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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사회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5부

by !))*!))* 2024. 1. 6.

간송 전형필(澗松 弼, 1906~1962)은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간송은 부친이 물려준 많은 재산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모으고, 지키는데 평생을 바쳤다.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짓고,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민족정신을 이어갈 교육현장을 지켜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수많은 서적과 서화, 석조물과 자기를 수집하여 국보로 지정된 것만 수 십 점에 이른다. 최근 경복궁 낙서 테러와 함께 간송의 문화에 대한 사랑을 알아보기로 한다.

 

 

전쟁 속에서 지켜낸 우리 문화재

그렇게 혹독하게 탄압하던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우리나라에서 도망치듯 몰러나자,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지. 누군들 기쁘지 않았을까 마는, 민족의 전통과 정신을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나긴 일본 식민지 시절을 견딘 온 간송에게는 그 기쁨이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지.

 

북단장에 있는 보화각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고 앞으로 잘 보존하고 연구해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간송이 인수한 보성학원은 달랐지. 앞으로 인재를 키워야 하는 학교는 계속해서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간송은 해방되자마자 학교를 넓히고 신축도서관도 세웠지. 그리고 도서관에 그동안 모아 온 귀중한 책도 보관했지. 그리고 ‘고적보전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그동안 흩어지고, 파괴되었던 우리 문화재를 조사하는 일을 했지. 간송이 태어나 처음으로 우리나라 공직에 나선 것이지.


하지만 우리나라는 6.25라는 커다란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운 이 전쟁으로 어디 한 곳 온전한 곳이 없었지. 보화각에 있는 문화재도 마찬가지였지. 북단장을 북한군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보화각에 보존된 문화재도 북한으로 가져가려고 했지. 하지만 문화재 포장을 맡은 분들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일을 지연시켰지. 가져갈 물건을 골라야 한다, 이것과 저것이 잘못되었다, 포장을 했다 풀었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 나중에는, 나무 상자를 짜야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다고 목수를 불러온다, 상자를 짤 나무가 없다, 목수가 없어 직접 만들어야 한다면서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세월을 보냈어.

 

그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어?
아니 그렇진 않았어!


서울을 되찾았다가 다시 북한군에게 빼앗기자, 이번에는 재빨리 지난 번에 만들어두었던 나무상자에 중요한 문화재만 포장해서 기차에 실어 부산으로 옮겼지. 그렇게 포장한 채로 거의 2년 동안 보화각의 문화재는 부산에서 보관하게 되었지. 하지만 미처 가져오지 못한 문화재와 북단장 표구소에 있던 많은 책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지. 보성학교 도서관에 있던 책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지. 간송이 어렸을 때부터 좋은 문고를 만들려고, 수십 년을 착실하게 모아 왔던 책들이 모두 흩어진 것이지.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간송은 부산에 있던 문화재도 안심이 되지 않았지. 그래서 서울이 다시 수복되자마자 1953년 10월에 서둘러 서울로 문화재를 옮겨왔어. 그러고 나서 간송은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지. 왜냐하면 문화재를 보관하던 부산 집이 문화재를 옮긴 지 10일 만에 불이 나서 전부 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흩어진 책들은 다시 찾았어.
아니 다시 찾은 것도 있고, 못 찾은 것도 있고.
어떤 사람이 간송에게 팔려고 가져온 것에는 예전에 자신의 것도 있었지만,
두말하지 않고 값을 치루고 되사들였지.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지!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기적처럼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은 1954년부터 다시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어. 간송만큼 우리 문화재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간송이 여러 젊은 학자들과 어울려 열심히 문화재를 찾아다니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 그러다가 문화재에 대한 기록을 남겨 연구자료로 보존하자는 의견들이 있자 간송은 흔쾌히 자신이 그 비용을 대기로 했어. 그래서 매달 자신들의 연구한 자료를 모아 책으로 내게 되었는데 이름은 '고고미술'(考古美術)이었지.

고고미술


고고미술이라는 글자체를 추사 김정희의 글에서 찾아내 사용하기로 결정해서, 간송은 밤새 글자를 찾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대. 다른 글자는 찾았는데, 마지막 ‘술’(術)자를 찾지 못한 것이지. 밤새도록 찾다가, 정신이 흐릿해지자, 혼자 부엌으로 가 술을 병째 한 모금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는 순간 ‘술’자가 눈에 들어오더래. 그렇게 찾던 글자가 술 한 모금 마시고 난 뒤에 바로 찾아낸 것이지. 재미있지. 술(術)과 술(酒)은 전혀 다른 뜻인데 말이야.

 

 

 


어쨌든 이렇게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지. 누가 무어라 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물러서지 않았지. 그래서 이렇게 많은 훌륭한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우리의 문화재를 사랑하던 간송은 1962년 1월에 홀연히 돌아가시고 말았지. 보화각에 수많은 문화재를 우리에게 남겨두고 말이야.

 

꼬맹아, 이제 왜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지 알겠니?
그런데, 누가 문화재를 만들었어?

글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나라 문화재니까 옛날 우리나라 조상들이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것이 문화재가 되는 거야?

그렇지. 그것들이 우리민족의 생활과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중요한 거야?

만약에 이런 문화재가 없다면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겠지.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만든 문화재는 조상들의 생각과 정신이 있다는 거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 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가져야 하지.
그냥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열심히 보고,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해야 하고, 책도 열심히 읽어야 하고.

그렇게 해야 할게 많아. 많으면 난 싫은데.

그래? 그러면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돼.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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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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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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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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