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이 어처구니없는 스캔들(scandal)을 일으킨 경우는 수없이 많다. 이런 스캔들을 추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관습, 관념에 대한 부정이라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이런 일은 언제나 않게 일어난다. 23년 3월 미국 미술평론가인 켈리 그로비어(Kelly Grovier)가 BBC에 기고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하여 어떤 작품이 스캔들에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3.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 1933~1963), 예술가의 똥( Artist's Shit) 1961
켈리 글로비어가 세 번째로 이탈리아 아방가르드 작가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Merda d'Artista(이탈리아 어), 1961을 소개한다. 먼저 그의 글을 살펴보자.
미술세계에서 뒤샹(Duchamp)의 <샘>(남성소변기)를 미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작가의 배설물을 작품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1961년 피에로 만조니는 결국 이런 시도를 했다. 그는 자신의 똥을 30g씩 담아 철제 캔 90개를 만들었다. 이런 행위는 캔 공장을 소유한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찮은 일을 한다는 비난에 대한 대답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2016년 경매에서 275,000유로(당시 가치 약 245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피에로 만조니, <예술가의 똥>이라는 작품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보충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피에로 만조니의 예술
피에로 만조니는 1933년 역사상 최고의 현악기 명품이 만들어진 곳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크레모나(밀라노 남동쪽) 지방에서 태어났다. 고향과 가까운 밀라노에 있는 브레라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했다. 1955년까지는 전통적 양식의 풍경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조니가 미술을 공부할 무렵은 이미 뒤샹의 다다이즘(DaDaism)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갔던 시절이고, 따라서 젊은 만조니는 뒤샹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자체에서 일어난 현대미술운동인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의 '미래주의'(Futurism)도 경험했다. 미래주의 작가인 움베르토 보치니의 작품도 여기에 속한다.
그는 기존의 예술 전통과 관습에 도전하며 참신 발랄한 작품을 선보인 아방가르드 예술가이다. 특히 예술적 표현 형식을 넘어서는 작품을 발표하여 예술의 영역과 그 본질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은 종종 사회적 관습 혹은 관념에 이의와 반문을 제기했다.
피에로 만조니는 1963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30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그의 존재와 예술적 유산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발전과 예술적 혁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아이디어와 실험적인 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피에로 만조니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술가의 똥>(Artist's Shit, Merda d'Artista(이탈리어 원제), 1961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61년에 만들어진 <예술가의 똥>이다. 철제 캔 90개에 자신의 변을 30g씩 채워 <Artist's Shit>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너의 작품은 똥이야'라는 비난을 아버지에게 듣고 화가 난 그는 철제 캔에 자신의 배설물을 담아 멋있게 자신의 사인과 시리얼 넘버를 붙였다. 게다가 라벨에 이탈리아어, 불어, 독일어, 영어로 '신선하게 생산, 보존했다'라는 문구까지 인쇄해서 붙였다.
이 작품은 예술작품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예술이 어떻게 평가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2016년 이 작품 시리즈 중 한 캔이 경매에서 27만 5천 유로(약 2억 4천5백만 원)에 낙찰된 기록도 있다. 30g이니까 2024년 순금 시세보다 비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시간이 흘러, 철제 캔에 실제로 똥이 들어 있는지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런 논란이 지속되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1989년 철제 캔을 따는 사건이 일어난다. 캔을 땄지만 실망스럽게 그 속에는 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은 캔이 들어있었다. 아쉽게 이들은 두 번째 캔은 열지 않기로 결정해 실제로 똥이 들어있는지 결국은 확인하지 못했다.
만조니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 규범과 관습에 도전하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일으키고자 했다. 일상적이고 흔한 것을 다른 맥락에서 제시함으로써, 현대인의 인식에 도전하고 반응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러한 예술적 실험은 종종 논쟁을 일으키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와 예술의 경계에 대한 재고를 초래했다.
4. 로버트 라우센버그 (Robert Rauschenberg) , 지워진 드 쿠닝 드로잉(ERASING de KOONING DRAWING, ROBERT RAUSCHENBERG), 1953
켈리 글로비어가 네 번째로 언급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먼저 보자.
1953년, V&A(예전에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이 현대인의 눈이 다윗의 성기를 받아 들 수 있다고 믿었던 같은 해,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물건을 벗겨내는 기술에 직접 도전했다. 작가가 일반적으로 하는 것처럼 연필, 붓, 끌을 사용하여 표면의 자국을 내는 대신, 지우개로 표면의 자국을 제거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진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친구인 윌리암 드 쿠닝(Willem de Kooning)에게 부탁해서 작품을 받아 지웠다. 그 결과 식별할 수 있는 흔적이 거의 없는 종이가 만들어졌고, 감상자가 이미지 없는 이미지가 과연 이미지인지 아니면 전시된 실제 작품이 부재를 둘러싸고 있는 빈 액자인지 판단을 요구하게 되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누구인가.
그는 사물을 이미지에 종속시키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이미지를 파괴하고 혼란시켜서 때로는 난센스, 또는 역설적으로 현실인식의 다른 길을 내보여 주고 있다.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는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언급하겠다. 결론을 우선 말하면 미국에서 태어난 진정한 미국인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첫 번째 현대미술가)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 복무를 마치고 파리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회화공부를 했다. 그리고 독일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요셉 알버스(Josef Albers)가 미국에 망명하여 블랙마운틴이라는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여기에 라우센버그가 1948년에 입학한다. 이후 라우세버그에게 요셉 알버스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또 하나 일화는 미국의 유명한 화상인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1907~1999)가 젊은 작가를 찾아 라우센버그를 방문했다가 그의 소개로 바로 옆 작업실에 있던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를 발굴하여 첫 저시를 열었다. 이들의 일화는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기로 한다. 레오 카스텔리에 관해서는 아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다시 돌아와서, 라우센버그는 미국의 작가로 첫 번째로 인정받은 작가이다. 그가 미국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을 깊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언급될 것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1961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장상을 미국 현대미술작가로는 처음 받았고, 이로써 유럽이 미국의 현대미술을 인정한 사건으로 당시에 온갖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지워진 드 쿠닝 드로잉 로버트 라우센버그>, 1953
이 작품은 액자와 서명까지 꽤 의미를 가지고 있다. 라우센버그는 뒤샹의 가르침에 따라 예술의 개념을 확장하고자 만드는 것이 아닌 지우는 것으로 미술작품을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시도가 성공하려면 누구나 미술작품으로 인정할 만한 작품을 구해야 하는데 평소에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20살이나 위인 윌리암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블랙마운틴에서 공부했던 라우센버그는 이때 드 쿠닝과 블랙마운틴에서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기에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었고 드 쿠닝은 흔쾌히 드로잉 한 장을 내주었다.
라우센버그는 몇 달을 세심하게 지워나갔다. 그리고 몇 년 뒤 제스퍼 존스가 이 작품을 보고서는 작품 제목과 명제표 그리고 금박액자를 고안해 완성했다.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면(현대미술 작품에는 흔히 보게 되는 무제) 무엇을 지운 것인지 정말 지울 게 있었던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정말 작가가 주장하는 대로 인지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 작품에 과학제품을 들이댄다. 2010년 이 작품을 소장한 샌프란스코 현대미술관에서 무엇을 지웠는지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찾아보기로 한다. 현대 기술은 인간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엑스레이에서는 드 쿠닝의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가 드러났다. 하지만 드 쿠닝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연필이나 목탄을 쓰고 지우개도 많이 사용해 누가 지운 것인지 분간하는 것은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목적은 드 쿠닝의 원본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워서도 만들 수 있다는 미술작품이라는 개념을 보려고 한 것이다.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다양한 실험적인 작업을 하면서 1953~54년 무려 스스로 콤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실험작업을 한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두 가지 모두 결합하는 작품을 지칭하는데, 실제로 라우센버그는 캔버스에 페인팅도 하고 물건도 함께 매달거나 올려서 결합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모노그램(Monogram, 1955~1559)이 있다.
'미술과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 3편 (1) | 2024.01.10 |
---|---|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5부 (1) | 2024.01.06 |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4부 (1) | 2024.01.06 |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 1편 (2) | 2023.12.30 |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3부 (0) | 2023.12.24 |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 - 2부 (1) | 2023.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