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이 어처구니없는 스캔들(scandal)을 일으킨 경우는 수없이 많다. 이런 스캔들을 추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관습, 관념에 대한 부정이라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이런 일은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일어났다. 23년 3월 미국 미술평론가인 켈리 그로비어(Kelly Grovier)가 BBC에 기고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하여 어떤 작품이 스캔들에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7.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Christo and Jeanne-Claude, 둘러싸인 섬, 1983
미국 미술평론가인 켈리 그로비어(Kelly Grovier)가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의 둘러싸인 섬을 선택한 이유는,
1983년 5월 크리스토(Christo)와 잔 클로드(Jeanne-Claude)가 마이애미 비스케인 만의 11개 섬을 2주 동안 분홍색 폴리프로필렌 천으로 감싸는 설치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경운동가는 해마와 물수리가 서식하는 60만㎡에 합성 플라스틱을 까는 것은 환경에 줄 영향을 걱정하면서 해당 작업 설치에 반대했다. 지역 공무원과 주민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의 취약성에 대해 논의하도록 강요하는 작품을 구성하는 대화가 예술가들의 목표 중 하나였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는
크리스토(1935~2020)는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불가리아 수도에 있는 소피아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57년 당시 공산권에 있던 동유럽의 체코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그다음 해 파리로 간 그는 평생의 단짝이자 예술동지였던 잔 클로드(1935~2009)를 만난다.
크리스토가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패킹(packing)이라고 부른 포장 작업이었다. 만 래이도 이와 비슷한 작업을 했으나 지속적으로 이 형식을 추구한 작가는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였다. 1964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고 대규모 포장 작업을 기획하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포장 작업은 막대한 돈이 드는 프로젝트로 긴 협상과 모금을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들이 포장하려는 건물이나 건축은 대부분 국가나 지방정부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단지 아이디어와 몇 장의 드로잉만으로 이들을 설득하고 자금을 모은다는 것은 쉽지 않으나 이들은 말 그대로 될 때까지 행동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파리의 <퐁네프 다리>(1975~1985),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인 <포장된 라이히슈타크>(1971~1995) 등이 있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 오렌지 깃발을 설치하는데 25년을 뉴욕시와 협상하여 <문 The Gates>를 2005년에 실현했다. 잔 클로드가 먼저 세상을 떠나 혼자 작업을 했지만 평생의 약속을 지키려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런 대규모 작업을 하면서 금전적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다. 즉 이런 대지미술을 하면서 돈을 벌지 못했다는 말이다. 한때 어리석게도 '이 두 사람은 뭘 먹고살았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돈벌이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협상을 위해 제작한 많은 드로잉과 설계도 그리고 프로젝트 실행 후에 찍은 사진을 미술시장에 내놓았다. 이런 기록물이 이들을 먹여 살렸다.
이을 평가하는 말 중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개념 정리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이가 많지만, 이들처럼 실행하려는 노력과 끈기는 이들보다 우월한 이는 없다." 맞는 말이다. 생각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8. 트레이시 에민 Tracey Emin ,1963~, 내 침대 My Bed, 1998
미국 미술평론가인 켈리 그로비어(Kelly Grovier)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설득되지는 않지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 미술에서는 침대가 미술작품에서 필수적인 소재의 하나로 사용되어 왔다. 티치안의 <우르비노의 베누스>부터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 고야의 벗거나 옷을 입은 <마하스>, 헨리 퓨셀리의 악마 같은 <악몽>까지 말이다. 그러나 영국작가 트레이시 에민이 1998년 터너상 전시회에서 자신의 헝클어진 <나의 침대>를 전시한 것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강렬하고 지속적이었다. 이 작품은 흐트러진 정신의 물질적 잔해로 둘러싸인 예술가의 삶에서 우울한 이야기 장소인 구겨진 침대는 현대 미술이 길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론의 대상이 되었다. 작품의 옹호자들은 마르셀 뒤샹의 <샘> 이후 80년이 지난 뒤에도 지저분한 침대가 이렇게 분노를 촉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여성이 미술관에 오는 남성에게 자신의 침대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분노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a woman should so brazenly set up residency in a man’s museum.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 영문이다. 못하는 영어로 나름 한글로 해석을 달았다. 번역이 아니라. 해석이 비슷하게 들어맞는지는 자신이 없다. 남자에게 여성이 지저분한 침대를 보여주는 것이 정말 낯 뜨겁게 부끄러운 일인 것은 맞다 싶어서...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은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의 젊은 영국 미술가들(yBa) 중에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자신의 잠재력 있는 예술가로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며 자신에게 20파운드를 투자하라는 편지를 사람에게 보내 자금을 확보했다. 이중에 후에 '화이트 큐브' 갤러리를 만든 갤러이스트 '제이 조플링'도 있었다.
1997년 사치가 yBa를 중심으로 연 기획전 <센세이션 Sensation> 전에서 처음 이름을 알렸다. 여기에는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마크 퀸(<Self>를 설명한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람. 1편)도 참여했던 전시이다. 트레이시 에먼은 현대미술로 자신을 성공시키기 위해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 그리고 남만 할 수 있는 형식 그리고 누구보다 비난의 한가운데 설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철저히 연구했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영국이나 한국은 여전히 보주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그렇다고 치고 영국도 꽤나 보수적인 사회에서 이제 막 기존의 전통과 관습에 반기를 들던 젊은이들의 문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데미안 허스트와 그가 졸업한 골드 스미스 대학과 그 동료들 사치의 등장 그리고 영국 대학에서 시작된 문화이론(culture theory)이라는 분야가 젊은 작가들과 이론가에게 선망이 되었을 시기였다.)
그녀는 자신과 동침했던 남자의 이름을 텐트 속에 자수로 놓거나(Tent), 남자 친구와 함께 잔 이후에 3일간 혼자 우울해 있던 침대를 그대로 작품(My Bed)으로 만들면서 자신을 알려나갔다. 이 작품으로 영국에서 권위 있는 터너상도 수상했으니 녀의 전략은 맞아 들어갔다.
거의 2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피부에 와닿을까? 하긴 지금은 어떤 일을 해도 쇼킹하지 않으니 별 감응은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 1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 2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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