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기좌도(箕佐島, 현재 안좌도)에서 1913년에 태어난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는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974년 미국 뉴욕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가꾸고 개척한 몇 안 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예술가로 화가로 산다는 것에 회의가 들만한 이 시대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본다.
1. 잊힌 김환기,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으로 한국 화단이 놀래다.
19060년대 후반에는 회를 거듭할수록 국전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높아가던 시절, '관전'(官展)이 아니라 '민전'(民展, 민간이 주최하는 전람회)으로 한국미술을 발전시키자는 의욕으로 여러 신문사들이 공모전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1970년 한국일보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대상을 받으며 김환기의 존재를 다시 국내에 알렸다.
김환기는 일본에서 그림공부할 때부터 여러 시인과 교유가 꽤 깊었다. 특히 시인 김광섭과는 여덟 살이나 위인데도 친하게 지내면서도 존경했다. 갑자기 김환기가 미국 뉴욕으로 떠난 이후 그들은 주로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김광섭은 1965년 연말에 연하장과 <저녁에>라는 시가 실린 잡지를 보낸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쳐다본다(중략)"으로 시작하는 우리에게 대중가요로도 잘 알려진 시이다. 김환기는 이 시를 보고 점을 찍어 내려갔다. 그런데 1970년 어느 날 김광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김환기는 뉴욕에서 듣는다. 실의에 빠진 그는 김광섭에 헌정하듯이 점화(點畵) 한점을 그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제목을 붙여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은 것이다.
1970년 6월 7일 김환기의 일기에는 "아침 9시 반. 전화소리에 깨다. 조세형(한국일보 워싱턴 주재 기자)으로부터 내가 <한국전>에서 대상을 탔다는 보고다. 11:30분. 추전이 날아오다. 상보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축하감사의 뜻을 몇 자 적어 띄우다. 아버지 떠나신 지 27년째 되는 제삿날이다."
그런데 사실을 김광섭은 1970년에 세상을 뜬 것이 아니라, 김환기가 1974년 뉴욕에서 먼저 숨을 거두고 나서 3년 뒤인 197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균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소식을 듣고서 제작해 탄생한 작품인 것이다. 슬픔의 감정을 예술로 승화한 본보기이다. 차갑고 냉정하며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말이다.
2. 김환기 그림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다.
김환기는 무지개 빛깔로 만든 깃발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꿈을 어머니가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 신안군 기좌도(현재 안좌도, 얼마 전에 '천사상' 사건으로 한국 미술계에 먹칠한 사건이 있었던 신안군 하의도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에서 부농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청도 이외에 신안에서도 조형물 사기가 있었다는데, 왜 지자체는 이런 일을 할까.
청도와 신안의 조형물 사기에 관해 미술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서울 중도중학에 진학한 김환기는 19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돌아왔지만 다시 그림공부를 한다고 일본으로 가겠다는 것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몰래 일본으로 밀항한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이후 1937년까지 연구과에 남아 있었다.
일본대학에서 배운 교과와 영향에 대하여는 아직 연구가 많지 않다. 물론 남아있는 작품도 거의 없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서구, 즉 유럽에서 벌어지는 최신 회화 현황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종달새 노래할 때> , <론도>와 같은 작품에서는 입체파 혹은 추상미술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환기가 출품했던 <이과회>(二科會)는 문부성미술전람회에서 일본화처럼 신·구 즉 2과(二科)로 분리하는 방식으로 서양화도 새로운 미술을 심사받을 수 있도록 제안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관점을 반발해 만든 단체이다. 이들은 문전에 참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당연히 이과회는 아방가르드 성향이 강한 민전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 김환기가 이끌렸음은 그의 성격으로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인다. <자유미술가협회전>도 마찬가지 분위기라고 할 수 있는데, 1937년 귀국 이후에도 1940년까지 작품을 출품해 추상미술에 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유학시절을 포함한 김환기의 초기 작품 성향은 추상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논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하학적 추상 혹은 입체파의 경향을 강조하여 김환기를 한국의 추상미술 선구자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여전히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 더욱이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 미술동네는 과도한 칭찬과 허구에 가득한 칭호들이 난무한다. 거장이니, 세계적이니, 명장이니 하는 과대 포장하는 말이 그것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거장**, 이렇게 형용해야 그 작가가 정말 거장이 될까? 이런 현상은 진정한 비평이 없는 미술계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김환기는 사진에 있는 동생을 모델로 하여, 화면 구성은 머리로 생각하며 그린 것이 <종달새 노래할 때>라고 언급했지만, 추상미술 등에 관한 언급은 없다. 김환기의 예술세계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무조건적인 찬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날로 일본 제국주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기좌도와 서울을 오가던 김환기는 40년을 넘어가 45년 해방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1944년 고희동의 주례로 김향안과 결혼한다.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영국, 이규상과 '신사실파'를 창립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나 곧 6.25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
이 시기 그린 작품으로 인상에 남는 것은 <피난 열차>이다.
김환기 작품 중에서 소품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참상을 김환기의 특유의 낭만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나누고, 기차에 빼곡히 들어찬 피난 가는 사람을 그린 장면이다.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구도를 택한 이유를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작지만, 단순한 구도와 절제된 색채 사용, 기본 사물 구조와 인물 표현 몇 가지로 피난 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마냥 절망과 실의에 빠져있던 김환기는 아니었던 것같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그림도 있다. 아래 작품은 비록 유화는 아니고 수채화이긴 하지만 힘들고 막막한 일상에서는 잠시 벗어나 바다를 즐기려는 사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부산 앞바다에 파도 모습을 표현한 것에서, 배에 가득찬 사람과 하늘에 여러 모양으로 떠 있는 구름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가늠할 수 있다. 천상 그는 낙천적인 눈을 가진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3. 꿈꾸던 파리에 작업실을 마련하다.
아무리 힘든 전쟁시기였어도 김환기의 예술성을 알아보던 이가 있었던 지, 그 난리통에도 부산으로 피난을 간 홍익대학 미학부에 교수로 취임한다. 물론 이전에 서울대학교에 교수로 취직한 것이 먼저이긴 하다. 1953년 휴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와 홍익대학에서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작업에 열중했다.
전쟁통에 설명적이고 현실풍경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제작하다고 점점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소재로 삼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달과 항아리, 산과 매화 또는 십장생과 같은 이미지를 조합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조선 백자를 사랑해서 많은 도자기를 수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제 지배하에 살았던 예술가이기에 특히나 우리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을 찾아내고, 사랑했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던 중 불현듯 파리를 가고 싶어했다. 예술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파리에서 화가들은 어떻게 살고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이런 마음은 부인 김향안도 같았다. 그래서 서로 언젠가는 파리로 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해 나간다.
그러다 1956년 서울 동화화랑에서 도불전을 열고 난 뒤에 5월 파리로 간다. 부인인 김향안은 이미 일 년 전에 파리로 건너가 김환기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작업실과 숙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59년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김환기는 여섯 번이나 개인전을 열며 작업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는 파리의 작가들 작품을 보고 그들의 생활을 보았다. 일본에서 학생 신분으로 미술을 배웠다면 파라에서는 당당히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 파리의 미술세계를 바라본 것이다.
이 시기에 수화는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과 그들과 차이를 아니 자신이 추구해야 할 예술 방향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 스스로 여기 거장들의 작품에는 모두 강력한 노래(시, 詩)가 담겨있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부르던 노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그린 작품들은 파리 가기 전에 그린 작품과 시각적으로 구분되는 차이점은 무엇보다 마티에르(캔버스 표면의 질감)가 두터워졌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물감을 캔버스에 바른다 혹은 색을 칠한다는 느낌이었던 제작방식과 달리, 물감을 캔버스에 올린다 혹은 구축한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두툼해진 것이다.
이런 방식은 작품을 보다 무게있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굴곡과 변화가 심한 선들은 보다 정제되고 단순하게 변하고 있다. 위 1957년 작품인 <매화와 항아리>에서 보듯이 화면 전체에서 매우 절제된 느낌을 받지만 그렇다고 사물 묘사를 아주 단순하게 했다는 느낌은 없다. 이런 화면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그만큼 김환기가 자신의 작품 제작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섬의 달밤>은 1959년 작품이다. 김환기 자신의 고향인 기좌도를 상상하게 하는 그림이다. 푸른 바다에 뜬 달과 그 달이 비추는 섬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소재로 그린 작품 <여름 달밤>(1961, 194×145.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 있다. 이 작품은 59년 작품과 달라진 점은 보다 크기도 크고, 언어는 더욱 정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잘 들여다보면 이후 뉴욕으로 건너간 김환기의 작품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단서가 들어있다. 그 단서는 검은 선은 단순히 검은색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붉은색 푸른색이 점점이 띠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김환기의 작품이 점화로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김상자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4. 떠오르는 새로운 국제 미술도시, 미국 뉴욕으로 가다.
파리에서 돌아온 김환기는 홍익대학교 교수로 예술원 회원으로 그리고 예술가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60년, 61년은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4.19나 5.16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현대화를 지향하면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을 겪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계도 이 시기가 겪었던 불협화음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김환기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대표하는 교수가 되었고, 1962년에는 대학정비령에 의해 홍익미술대학이 되면서 초대 학장이 되었다. 서울대파와 홍대파로 나뉘어 국전 운영에 관한 이견 때문에 미술계가 분열되던 시절, 다시 한국미술협회로 통합되면서 되면서 김환기는 1963년 한국미술협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또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 미술작가들이 국제적인 전시 예를 들면, 비엔날레 등과 같은 전시에 작가를 선발하여 출품작을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브라질 '상파울루비엔날레'가 명성이 있었던 시기라 많은 작가들이 이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외국에 나가 많은 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김환기도 한국미술협 회장이 되던 해인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가로 선정되면서 상파울루로 갔다. 여기서 김환기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미국 뉴욕으로 가버린다. 그것이 1963년 10월경이다. 미국 뉴욕은 현대미술의 수도로 새롭게 떠오르던 도시였다. 흔히 잘 나가다는 작가는 거의 뉴욕으로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미술시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예술도 자본이 있어야 성장하는 것이다. 어쨌든 안락한 서울 생활을 버리고 힘들고 가난한 뉴욕 생활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김환기였다. 뉴욕시절 초기에 신문지로 콜라주를 한 것도, 60년대 말에 파피에 마셰(종이 찰흙)로 제작한 <항아리> 같은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뉴욕은 팝아트, 옵아트 영향을 벗어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극단을 달리는'색면추상' 회화가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레오 칼스텔리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 '아방가르드와 키취'가 대표적인 비평문이다.)가 미국 뉴욕의 화단을 모더니즘으로 이끌던 시기이다. 간단히 정의하긴 어려우나, 미술평론가 고 이일선생님이 말한 '환원과 확산'이라는 용어를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물과 현상을 환원하여 순수 상태로 나아가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김환기도 자신의 그려왔던 소재에서 환원한 상태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뉴욕 시대 초기에는 구체적인 형태는 사라지고 점점 선과 색으로 구성된 형태로 나아간다. 특히 이 시대 눈여겨볼 것은 그동안 조금씩 보였던 긴 선 속에 들어 있던 점 혹은 단색들은 하나의 조형요소로 점점 화면에 도입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림의 기본적이고 가장 원초적인 요소 점에 몰두한 김환기는 점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전에 제작한 작품에서는 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려서 만든 것이었다. 적어도 60년대 말까지는 점에 천작한 김환기의 작품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형태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사용하던 캔버스 천도 목화솜으로 만들어 흡수력이 좋은 코튼(면)으로 바꾸면서 점을 그린 것이 아니라 찍어내기 시작했다. 어떤 사물이나 형태를 모방해 그려내는 것이 아니기에 철저한 계획도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작품마다 번호를 달고 그날그날 작업 일기를 써나갔다.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나 작업 방향, 계획 이런 것을 기록하면서 어떻게 이 점화를 발전시켜 나갈지 고민했다. 작품에 '14-Ⅲ-72, #223' 이런 형식의 번호들이 붙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 이후로는 김환기 작품이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대표작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모두가 하나같이 우리의 심성과 들어맞는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김환기의 작품을 사랑하게 된다.
자칫 점을 찍어서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은 지루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환기는 여러 장치를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푸른색만이 아니라 붉은색, 노란색 등 색을 다양하게 사용하거나 점들 사이에 선들이 지나가게 한다거나, 점을 찍는 순서를 바꾼다거나 해서 화면을 지루하지 않게 구성했다.
그러면서도 1974년 생을 마칠 때까지 그가 제작한 많은 점화들은 맑고 투명한 색감으로 우리의 영혼에 어떤 울림을 주고 있다. 그래도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윤택하지는 않았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화가의 작품을 미국 미술시장에서 선선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몇의 후원자들은 그의 작품이 가진 진가를 알아보고 적극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작품 <Universe 5-Ⅳ-71 #200)(1971) 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되었다. 당시 환율로 약 132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작품으로는 최고가 낙찰이었다. 근현대 미술작품으로는 지금도 이 기록은 유지되고 있다.
이 작품은 푸른색 가로 세로가 같은 정방형 작품으로 반쪽씩 상단에 있는 원형을 중심으로 점이 돌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주'라는 제목으로 상상하건대 가운데 별을 중심으로 주위 별이 도는 형태를 수없이 많은 점을 찍어 형상화하고 있다.
왼쪽과 오른쪽은 같은 푸른색이지만 묘하게 채도 차이가 나면서 구분되어 보이게 제작되었다. 점화로 보기 드물게 대작이다. 또 화폭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난 1974년 세상을 타계하기까지 작가를 후원한 의사 '마태 김정준'이라는 분이 1971년에 직접 구입하여 소장하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크리스티 경매에 처음 나왔으니 많은 이들에게 당연히 주목을 받았다. 김환기 스스로도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겨, 1971년 뉴욕포인텍스갤러리 개인전에 출품하면서 포스터로 사용했다. 또 1975년 상파울루비엔날레도 출품했던 작품으로 전시이력도 좋은 작품이다.
2019년에 이 작품이 낙찰된 당시에는 낙찰자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세아그룹 김웅기 회장이 소장자로 밝혀졌다. 2022년에 세아그룹에서 운영하는 'S2A 미술관'에서 이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하루에 거의 열 시간씩 작업에 매진하던 김환기는 1974년 갑자기 쓰러졌다. 아마도 과로 때문에 생긴 병이었을 것이지만, 7월 7일에 입원하고 수술하였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7월 25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묘는 미국 뉴욕 주의 켄사코 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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