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꽃 피는 시절이 다가온다. 매년 봄을 맞이하지만, 봄은 항상 사람을 설레게 한다. 이 시절에 떠오르는 그림, 따스한 봄볕이 드는 오지호의 <남향집>이 생각난다. <남향집>은 2013년에 등록문화재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근대미술작품으로는 처음이다.
오지호의 <남향집>(등록문화재 제536호)에는 그리움이 있다.
오지호(1905~1982)는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1931년 졸업하고 귀국했다. 당시 조선 화단은 소위 '풍토주의'에 경도되어 초가집, 소, 한복 입은 여인 등 고답적이거나 농촌 풍속을 소재로 한 경향이 주류였다. 이에 오지호는 조선의 풍경과 공기에 맞는 명랑하고 밝은 색채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1935년 학창시절부터 친구였던 김주경의 도움으로 개성 '송도고보' 미술교사로 간다. 송악산 밑 김주경이 준 초가집에 1944년까지 살았는데, <남향집>에 나오는 집이 바로 그 집이다.
오지호의 많은 작품 중에서 그리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그리고 약간 늦은 느낌은 있지만, 찬 기운 가신 이른 봄에 볕이 잘 드는 거실 한가운데 걸면, 화사한 기운이 살아날 듯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이 작품은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6호로 지정되었다.
세 단으로 된 돌계단을 올라 작은 마당 앞에 선 커다란 감나무 그림자가 서쪽으로 약간 기운 시간에 막 초가집 문을 나서는 아이가 있다. 그리고 나서려는 초가집 벽에 붙어 오지호가 삽살이라고 부르던 흰 개가 졸고 있다. 땅도 좁고 하늘도 좁게 그려 초가집이 화면 전면에 꽉 차게 그린 이 작품은 오지호가 "회화는 빛의 예술이며 태양에서 태어났다"는 회화론에 가장 들어맞는 그림이다.
초가집이 화면을 거의 채우고 있지만, 오지호는 커다란 감나무와 그 뒤에 붉은 원피스를 입은 오지호의 둘째 딸 그리고 그 뒤로 문을 열어 초가집 뒤편까지 시선을 끌어냄으로써 화면에 깊이를 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색도 초가집을 연상하게 하는 색이지만, 특히 화면 한가운데 커다란 감나무 그림자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인상파가 주장하는 햇빛의 색이 모두 들어있어 지루하지 않다.
오지호는 일본 동경학교 재학시절 구로다 세이키( 黒田清輝, 1866~1924)의 조수였던 후지시마 타케시(蕂島武二, 1867~1943)에게 배웠다. 후지시마는 구로다와 달리 1905년부터 파리와 로마에서 2년씩 유학을 하면서 후기인상파와 아르누보에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다. 구로다의 '외광파'라고 하는 일본식 인상파와 달리 후지시마는 보다 본격적인 인상파를 제대로 배워고 이를 가르쳤을 확률이 높다. 또 오지호가 일본 동경유학을 갔을 무렵에는 이미 구로다의 외광파는 많이 세력이 약해져 있었다.
최초로 1938년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총천연색으로 출판하다.
190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오지호는 보성군수를 지낸 오재영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3.1 운동 직후 나라를 잃은 통한으로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오지호는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지고 있었다. 전주고보를 다니다 서울 휘문고보로 편입하였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유학한 고희동이 미술교사로 있었다.
1922년 첫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서 나혜석의 작품을 본 후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후지시마 타케시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돌아와 송도고보 교사로 있으면서 직장과 집 모두 소개해 준 김주경과 최초로 총천연색 2인 화집을 발간한다.
오지호는 1940년에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동아일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인상파를 제대로 주차하면서, 조선의 자연을 표현하기에는 인상파보다 적절한 것은 없다는 것을 설파한다.
조선의 대기는 자연을 색채적으로는 거의 원근을 구별할 수 없는 투명 명징한 것이다.
이 맑은 대기를 통과하는 태양광선은 태양에서 떠나올 때와 거의 같은 힘으로서 물체의 심저에까지 투과된다. 그러므로 이때 물체가 표시하는 색채는 물체 표면의 색채만이 아니고, 물체의 조직 내부로부터의 반사가 합쳐서 가장 찬란하고 투명한 색조를 발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회화의 근본문제, 1940, 동아일보)
2인화집에 실린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하면 <처의 상>일 것이다.
흰색 저고리와 붉은 고름, 그리고 하늘색 치마를 입은 우리가 모범답안처럼 말하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모습 그대로이다. 밝고 화사한 모습이 오지호의 화론에 아주 들어맞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남으로 내려와 조선대 교수를 지내며 후진을 양성하다.
해방 이후 1948년에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호남 화단의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특히 그의 활동 중에 눈 여겨봐야 하는 것은 바로 국한문 혼용을 주장한 일일 것이다.
1970년 정부가 교과서에 모든 한자를 제거하고 오로지 한글만 사용한다는 것을 공포하자, 오지호는 한자 폐지에 대한 폐해를 역설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발표하여 한자 교육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1975년에 다시 한자 교육을 부활시키다는 방침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교과서에서 한자는 사라졌다.
이런 오지호의 기질은 아버지의 강건한 기질을 이어받아 남다른 민족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사실 인상파는 파리에서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국내외 작가와 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섭의 예술인생은 전쟁과 우리의 무지한 문화현상에 지고 말았다 (1) | 2024.03.25 |
---|---|
찬란한 이 봄날에 내 슬픈 전설은 몇 페이지 일까- 천경자 작가는 22페이지 (0) | 2024.03.22 |
병마로 절필한 향당 백윤문, 잊혀진 그의 동양화 작품 다시 읽다 (0) | 2024.03.18 |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수화 김환기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3) | 2024.03.14 |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3편 (3) | 2024.03.07 |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2편 (1) | 2024.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