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1916~1956)은 자신의 예술을 모진 세상살이와 맞바꾸며 짧게 살다 간 화가이다. 그 짧은 시간에 그의 삶은 신화로 묘사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그림을 겉으로만 보고, 어떤 심정으로 '그렸을지' 하는 진정으로 하는 상상은 없어지고 말았다. 잔인한 4월이 다가오려나 보다, 비가 오려는 것을 보니…
1955년 미도파화랑 개인전을 열기까지
1950년 12월 원산폭격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한 이중섭은 제주로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두 아들과 아내를 일본으로 보내고, 삽화, 표지화를 그리며 생활했다. 물감이 없어서 양담배 속지인 은박지에 뾰족한 철로 그린 은지화가 이때부터 그려졌다.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맺어질 무렵 이중섭은 공예가 유강열의 도움으로 통영 나전칠기전습소 강사로 나가게 된다. 비교적 생활이 안정되고 물감을 살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본격적인 유화 작품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통영의 풍경이나 소를 그린 것은 대부분 여기서 그린 것들이다.
이중섭은 일찍 아버지를 잃은 탓에 부자였던 외할아버지가 살던 평양으로 가 어릴 적에는 유복한 생활을 했다. 그림에 재주가 있던 이중섭은 1936년 일본 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 미술대학) 입학하였으나 자유로운 분위기인 문화학원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여러 유학생 중에 이쾌대, 김환기, 최재덕이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극으로 치닫던 1943년 귀국하여 일본이 야먀모토 마사코와 결혼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한반도 남쪽 끝인 통영에서 삶에 희망을 놓지 않고 이어가고 있었다. 1954년 6월 어느 날 김환기 등 여러 친구의 도움으로 1955년 1월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서울에 올라와 작업에 열중했다.
1955년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성황리에 개인전이 열리다. 그러나
기록마다 다르지만,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지화 등 소품 10점이 전시되었다고 하지만, 당시 발행된 리플릿과 숫자는 상이하다. 하여튼 판매예약을 알리는 붉은 딱지가 26개나 붙었다.(지금도 아트페어나 갤러리에 가면 이런 방식으로 한다.) 전시가 끝나면 값을 치루고 작품을 갖겠다는 표시가 이렇게 많으니 여린 가슴을 가진 이중섭도 기쁨의 술잔을 들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삶에 보탬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아내가 일본 서적을 들여와 파는 도서 중개업을 벌였지만, 사기만 당하고 빚은 더 늘었다. 그래도 빚을 갚고, 일본으로 가족을 만나러 가겠다는 일념으로 개인전을 벌인 그에게 이런 판매예약 기세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했다.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인 흰소는 이중섭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소가 앞발을 차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듯한 역동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꼬리를 들어 올리고, 한껏 힘이 들어간 뒷발과 고개를 돌려 정면을 슬쩍 바라보는 황소의 붉은 코와 입이 성이 잔뜩 난 모양이다.
여린 가슴을 가진 이중섭은 세상의 고통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이 그림을 그리며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절망과 고통은 없다. 오로지 성난 황소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만 보일 뿐이다.
이 작품은 1954년부터 56년까지 우리나라 1호 미술평론가인 석남 이경성이 홍익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 구입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1955년 1월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이중섭개인전에서 구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경성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당시 작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우리나라 미술계 지형도를 세세히 기록한 사람이다. 수화 김환기하고도 같은 학교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고, 이중섭의 미도파화랑 전시도 김환기가 팸플릿을 제작할 정도로 관여했기에 이런 정황은 충분히 들어맞는다.
하지만 실패, 대구에서 다시 재기를 꿈꾸다 또다시 실패하고 행려자로 세상을 떠나다.
'노 쇼'(no show)라고 하던가. '저 사람 사는데 나도 사야지'라고 욕심을 냈다가 정작 전시가 끝나고 값을 치를 때가 되자 얼굴을 싹 바꾸고 마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우리나라에서 호날두가 노쇼를, 홍콩에서는 메시가 노쇼를 일으켜 많은 이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정도로 싫어하는 행위지만, 미술에서는 이 시기에는 당연했고, 요즘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이들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체면과 허세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이에 영남일보 기자로 있던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대구에 있는 미국공보원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대구로 내려간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을 겪은 한국이지만 수도인 서울과 대구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이중섭 개인전은 미도파화랑보다 대구공보원화랑에서 더욱 비참하게 실패한다. 결국 이중섭의 마지막 한 줄기 희망마저 꺾이고 말았다. 세상이 자신을 속였다고 한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슨 대단한 예술가라고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음식을 거부한다. 더욱이 정신에도 이상이 생기게 된다.
시인 구상에게 더 이상 신세 지기 어려워 1955년 12월 서울로 올라와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56년 9월 6일 행려자로 생을 마감한다. 3일이 지난 뒤 김이석에 의해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밀린 병원비 절반을 깎아 장례식장에서 모은 돈 9만원으로 납부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 세상과 마지막 이별도 쉽지 않았다. 이중섭에게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시절부터 그의 예술성을 알아본 친구들이 많았기에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순진한 그를 세상은 놔두질 않고 속이는 친구들도 들끓었다.
껍데기가 판치고, 넘치고 넘치는 허세에 속아버리는 요즘, 우리에게 이중섭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 '밥벌이로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한다고 허풍을 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은 가짜라고 했다'는 이중섭은 신화이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차가운 병실에서 숨을 거두면서도, 너무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알리지 싫었던 이중섭은 앞으로 없을 신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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