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외 작가와 전시

안중식은 같은 장면인 '백악춘효'를 왜 두 점 그렸을까? 그것도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 1편

by !))*!))* 2024. 3. 25.

심전 안중식은 1915년 한 해에 백악춘효를 두 점 그렸다. 이미 나라는 잃어, 나라의 궁궐마저 허물어 물품 전시장(일본 총독부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단정한 예서(隸書)로 백악춘효(白岳春曉)라고 명명한 그림을 그린 심정은 어떠했을까. 

 

백악춘효 (白岳春曉)를 그린 배경과 의미

 

 

고종이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리 성공적이 못했던 일련의 일들로 점점 나라는 기울어 갔다. 1897년 갑오개혁으로 고종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다시 제국의 꿈을 꾸었으나, 소위 '을사5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경찰권까지 뺏기고 만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으로 나라가 없어지고, 이를 기념한다고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 회장을 만든다고 경복궁에서 4천 칸이나 넘는 건물을 허물어내고, 광화문 밖에 있던 월대는 물론이고 해태상도 없애고 각종 탑으로 엉커 있었던 시절이 1915년이다. 

 

그리고 50여 일 동안 110만 명이나 이 공진회를 본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광경을 지척에서 바라본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의 심경은 오죽했을까?    

 

어쩌면 그 울분을, 비통함을, 서러움을, 자신이 가장 할 수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렸다는 작가의 설명이 없으니 어찌 맞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마는, 똑같은 장면을 두 장이나, 그것도 정성을 다해 그렸다는 것은 충분히 그 심경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심전 안중식의 백악춘효심전 안중식의 백악춘효
안중식, <백악춘효>, 비단에 담채, 1915, 129.5×50.0cm, 근대231 등록문화재(좌)  126.1×51.9cm, M901 등록문화재(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은 여름에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같은 해 가을에 그린 것이다.

 

백악춘효는 백악의 봄이라는 말이다. '백악'은 경복궁 뒤에 우뚝 산이 북악산이다. '춘효'는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새벽 봄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북악산의 이른 새벽이라는 뜻인데 여름과 가을에 그린 그림에 왜 '춘효'라는 봄이라고 붙였을까? 그것도 '새벽'이라는 뜻과 함께.

 

이 작품에서 심전은 이미 경복궁이 망가지고 있었던 장면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전혀 그런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수많은 구경꾼이 왔다갔다 하며 혼잡한 모습을 한 경복궁 앞에 월대와 해태상이 아니라, 울창한 나뭇잎으로 가려진 경복궁을 그렸다.  그것도 안개가 가린 장중한 궁궐을 말이다. 어쩌면 생명을 시작하는 봄을 상징하면서 새벽과 같은 기운을 가지라고 이런 그림을 그리진 않았을까? 

 

화려하고 기운이 넘치는 궁궐이 아니라, 막 기운이 세상에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궁궐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제목에 봄이라는 글자를 넣고, '여름'(乙卯夏日心田寫(을묘하일심전사, 을묘년 여름에 심전이 그리다)과 '가을'(乙卯秋日心田安中植, 을묘년 가을에 심전 안중식)에 그렸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왜 같은 장면인 두 점을 그렸을까?

 

 

 

누군가의 주문을 받아서 그렸다면 제목 옆, 한자로 기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없이 이렇게 정성 들여 그렸다면 기울어가는 나라를 애통해하면 그린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미 그린 지 110년이 되었고, 기록도 없으니 알 길은 없다. 다만 보는 사람의 상상력과 해석의 힘을 빌어야 한다.

 

두 점이 나란히 있으니 비교하기 좋다. 눈에 보이는 대로 차이점을 열거해 보자.

'백악춘효'라는 글은 예서로 썼지만, 두 개가 조금씩 다른 모습니다. 특히 봄 춘(春) 자는 매우 차이가 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름과 가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름은 기운이 높아 나무 잎이 생생하고 곧을 것이고,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고 다음 봄을 준비하기 위한 이른 시작인 시기이다. 따라서 여름보다는 고개를 숙이고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모습이 타당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심전이 정말 심혈을 기울인 이름이고 글씨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백악춘효라는 제호 오른쪽에 붉은 낙관이 찍혀있다. 이것을 두인(頭印, 제목 오른쪽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자 사이에 찍는다.)이라고 하는데, 당호(서재이름)나 길어(좋은 말)를 쓰는데 읽을 수 없다.(다음에 알게 되면 덧붙여 쓰겠다)  여름본과 가을본이 서로 다르고 특히 가을본에는 전서로 찍혀있다.

 

 

그리고 제작일시를 적은 문장 왼쪽에는 백문인과 주문인, 다시 말하면 이름(백문인, 음각으로 글씨가 흰색)과 호(주문인, 양악으로 글씨가 붉은색)가 찍혀있다. 이 두 가지는 여름본과 가을본 모두 같은 것을 사용했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잎이 덜 무성한 것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른쪽 가을본에는 두 개가 있어야 할 해태상이 하나밖에 없다. 안개가 여름본과 달리 광화문 앞까지 덮고 있어, 안개에 갇힌 것인가 자세히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안개 밑으로 해태상 좌대가 아니라 나무 밑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태상 하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심전 안중식이 빠트리고 만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세세하게 그린 그림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심전 안중식이 왜 백악춘효를 두 점을 그렸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운명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 이 작품은 1915년에 그린 것으로 110년이 된 것이다. 오른쪽 가을본은 왼쪽 여름본보다 황토색이 진하다.  따라서 자세하게 보기 어렵다. 아마 왼쪽 여름본은 보존수리를 해서 묵은 때를 지운 것으로 보인다. 두 작품을 비교할 대 이 점을 감안하고 살펴야 한다.

 

그리고 심전 안중식에 관해서는 다음 편에 이어서 포스팅할 것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