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 조석진이 외조부이고, 평생지기 이당 김은호와 사형지간인 의재 허백련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 했으나, 모진 우리의 역사는 그를 고독으로 몰았다. 세속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나서지 않았던 그는 사생을 위한 여행은 잊지 않았다. 세상이 던진 고독을 술로 달래며 남긴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정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소정 변관식은 외조부 소림 조석진을 따라 서화에 입문했다.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은 황해도 웅진에서 한의사인 아버지와 화원(畫員) 집안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외가 쪽 재능이 있었는지 외조부 조석진을 따라 1910년 그의 나이 12살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와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졸업했다.
당시 보통학교에서 미술교육은 실물을 모사하는 학습으로 일본 근대의 사생화법과 서양 미술교육이 결합된 것으로 변관식이 평생 사생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공업전습소 도기과에서는 도기를 빚는 것보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생업을 위한 바탕이 되었고, 도자기에 그린 그림을 많이 남긴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외조부 소림 조석진은 소정 변관식이 서화에 발을 들여놓는 것에 그다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석진은 조선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이었지만, 이미 나라는 외교권을 잃고 1910년에 완전히 일본과 병합된 상황에서 전망이 그다지 밝은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외손자의 재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지, 1911년에 설립된 서화미술회에 화사(畫師)로 있던 조석진은 1916년이 되어서야 서화미술회에 출입을 허락한다. 이에 변관식은 정식으로 입학한 것이 아니고 연구생 신분이었지만, 당시 서화미술회에 다니던 이상범, 이용우, 노수현 등 비슷한 또래들과 친하게 지내며 동양화를 배운다. 특히 여기서 만난 이당 김은호와는 후에 일본 유학에 동행하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된다. 이와 함께 외조부인 조석진은 도제식으로 변관식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당시 서화미술회의 교육방법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자원화전'이나 '해상명인화고'와 같은 화보류를 모사하거나 화사(스승)이 그려준 그림을 보고 모방하는 형식이었다. 한마디로 도제식 교육이었다. 하지만 변관식은 가진 재능으로 인해 빠르게 성장하였고, 외조부는 은근히 이를 자랑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변관식의 초기 활동은 서화미술회와 외조부에게 어느 정도 학습을 마치고, 우리나라 최초 미술단체인 서회협회(1918년 창립) 전람회와 1922년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이 시기에 대한제국은 사라져 국가 차원의 미술제작활동은 사라졌지만 민간에서 조금씩 화랑이 등장(물론 주 고객은 일본인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화가들의 작품을 거래)하고 동양화 휘호회가 빈번하게 자주 개최되던 시기였다. 변관식도 서화협회에 전담 간사 역할(1929년)도 하고 , 초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을 한다.
변관식이 처음 화단에 등단한 것은 1921년 서화협회전을 통해서라고 알려진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참가하여 4회까지 연속으로 입상한다. 이를 계기로 이용문의 후원으로 당시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었던 고무로 스이운()의 만남을 주선하고, 고무로는 변관식과 김은호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1925년부터 29년까지 4년간 일본에서 유학을 하게 된다.
변관식의 1910년대 제작한 작품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촉산행려도(蜀山行旅圖 : 중국 안휘성에 있는 촉산을 여행하는 그림)는 심전 안중식의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 : 단풍나무 숲에서 수레를 세우다)와 비교해 보면 스승들의 화풍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화면 구성이나 붓의 놀림 심지어 화제까지 비슷한 서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화업을 배우는 과정에 있어 스승의 잘된 작품을 모방하여 능력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촉산행려도>(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는 언뜻 보기에 스승의 기교에는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23세의 나이라고는 하지만 그만큼 변관식은 어릴 적부터 재능을 가꾸고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들의 화풍은 흔히 문인들의 수양의 하나라고 하는 관념적인 서화인 명나라의 남종화를 이어받아 보다 전문적인 화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 초기의 사왕오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학계에서는 평가한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전통적인 화법을 이어받은 화원으로, 이들이 서화미술회의 화사로 있으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 영정조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사회변동
우리의 교과과정에서 배우기로는 영정조시대에 활약했던 화가들, 겸재 정선(1676~1759), 단원 김홍도(1745~ 1806), 혜원 신윤복(1758~)의 화풍을 실경산수와 풍속화라고 배웠다. 특히 정조 시대는 '규장각'의 설치로 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이 등장하여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맞물려 위에 들었던 화가들은 실재 경치를 그림으로 옮기는 화풍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또한 실재 생황상으로 그림으로 옮기는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이런 현상을 점점 약해지고 만다.
영조 이후에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져 오는 동안 실학사상은 쇠퇴하고, 경제체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져 간다. 상품을 화폐로 거래하는 경제체제가 발달함으로써 한양의 세도 가문과 상인, 하급관리 등에게 부가 집중하면서 영정조시대의 실학사상은 사라지고, 사치스러운 물품과 화려한 문화가 등장한다.
부유층은 바둑과 장기 등 여가생활을 즐기며, 청에서 들여온 문방구와 골동품, 분재와 수석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호사취미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민화의 책가도에 들어 선 물품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물론 민화는 한참 뒤에 유행하는 그림형식이긴 하다) 따지면 이런 호사스러운 물품을 동경하는 현상은 이미 김홍도가 활동하던 18세기부터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 風流 圖)는 제목과 달리, 조선의 선비정신에 철저히 위배된 물품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을 간단히 해석하면 '베로 만든 옷을 입은 선비가 풍류를 즐기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절제와 검소를 최고의 도덕가치로 여겼던 선비가 주변에 두고 있는 물품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물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림 가운데, 목 위가 꺾이고 줄이 4개인 당비파를 켜고 있는 선비는 버선발이 아니라 맨발이다. 그만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라는 표식일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물품, 선비 앞에는 고급 악기인 생황과 칼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빙열이 드러난 채 받침대 위에 있는 병은 송나라 시기에 제작된 쌍이(귀가 있는 병) 청자로 보이고, 그 옆 청동기에는 산호와 여의 그리고 편지가 말려서 들어있다. 이것들은 두말할 것 없이 값비싼 수입골동품이다.
화제는 '지창토벽(紙窓土壁) 종신포의(終身布衣) 소영기중(嘯咏其中)' 단원(檀園)'이다. 뜻은 종이 창이 있는 흙벽 집에 평생 평생 베로 지은 옷(벼슬 없는 선비를 비유한 말)을 입고, 시를 노래한다'라는 의미이다. 명나라 문인 진계유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이를 비틀어 해석하면, 마음을 선비처럼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세속적인 부를 갖추어야 하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가 김홍도 자신인지 혹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이라면 이 주인공은 돈 많은 부잣집 누군가를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이런 시기를 거쳐 점점 거세진 외세 침입은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등장으로 쇄국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 시기에 점점 미술은 새로운 기운은 사라지고 청나라의 문화 유입으로 그 영향이 거세진다고 할 수 있다.
이후부터 동양화가 등장하기까지의 상황은 아래의 글에서 조선말에서 대한제국 말까지의 역사와 동양화의 등장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라진 '동양화'와 '서화미술회' 시절의 '동양화' - 2편
변관식의 초기 화풍과 그의 심경을 추측하다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화와 김홍도, 신윤복 등의 풍속화가 18세기를 대표하는 미술문화 현상이라고 하다면 그 이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원인으로 이런 현상은 세력을 잃어간다. 이런 문화현상의 변화는 당연히 사회현상과 경제상황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영정조시대에 실학사상이 위축되고,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됨으로써 청으로부터 수입된 화려하고 귀한 골동과 중국의 서화들이 인기가 높아진다. 미술에서도 정선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강희언, 김윤겸, 최북 등이 있었으나, 강희언은 정선의 <인왕산도>에 실린 찬문에 "진경을 그리는 사람은 매양 지도와 비슷하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된다"라고 할 정도로 고민한 흔적도 있다.
이런 문화 현상은 결국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주요 문인들이 중국 청의 문사들과 교류하며 전래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즉 18세기 현실에 밀접한 풍경과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보다는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금석학과 골동 취향에 빠져들며 청나라 초기의 사왕(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원기(王原祁)·왕휘(王翬)) 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화풍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조선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오원 장승업을 비롯해 조석진과 안중식은 이전 김홍도와 신윤복의 화풍과 다른 중국 청의 사왕 계열의 산수화를 따르고 있다고 학계에서는 평가한다.
청의 초기 사왕산수화 경향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고원법으로 섬세한 필치와 화법으로 화려한 화면을 구성한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매우 전문적인 기술을 쌓지 않으면 도달하기 어려운 화법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안중식과 변관식의 화면 구성을 보면 유사한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변관식은 비록 친구들보다 늦게 본격적인 화업을 외조부에게 받았지만 열심히 화업을 쌓을 덕에 기교면에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6살 즈음 즉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할 시기에 부친이 사망했다 이어 22살에는 어머니와 첫 번째 부인이 빈곤한 생활 속에서 사망하자 크게 실의에 빠져, 이 시절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록 한의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다지 유복하지 못한 생활은 그를 동양화가로서 즉 직업화가로서 장래룰 확실하게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양화라는 개념이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고, 직업 화가는 나라가 없어지면서 화원이라는 지위는 기대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미술시장에서 자신의 그림을 누군가가 사주어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외조부마저 세상을 떠난 마당에 그는 매우 상심이 컸을 것이다. 이제 막 생겨난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아무리 오랜 전통을 가진 서화의 한 부분인 동양화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앞 일을 확신하지는 못을 것이다. 든든한 후원자이자 스승인 조석진의 사망과 부모와 아내마저 잃은 그의 심정은 그를 더욱 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들여 세속을 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변관식은 이 시기의 자신의 심경을 소상히 밝힌 기사나 자료는 거의 없다. 그저 단편적으로 자신의 심정을 밝힌 자료 정도가 있을 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뜻밖에 만난 소정 변관식 초기작품(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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