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휴전이 되고 서울로 올라온 변관식은 어느덧 쉰이 넘은 나이가 되고, 작품세계는 완숙해졌다. 그는 돈암동에 '돈암산방'이라는 작업실을 마련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담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해방 이전에 사생 여행을 하면서 남겼던 스케치를 바탕으로 '금강산 시리즈'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림이 대다수이다.
해방 전에 그린 스케치로 자신만의 관념산수를 제작하다.
50년대 변관식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것들은 금강산을 그린 작품들이다. 크기도 대작들이 대부분이다. 실경을 바탕으로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풍경을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대로 옮기려는 의도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화면 구도에 따라 사물의 위치를 바꾼 작품들이다. 그 풍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풍경과 그림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글로 표현하기가 애매하지만, 자신만의 관념산수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관식은 동양화 혹은 산수화라는 장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풍경화를 그렸다고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1959년에 그린 <외금강 삼선암 추색도>에서는 동양화의 준법이나 원근법은 보기 어렵다. 근경, 중경, 원경 이런 구분도 그다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다.
이처럼 외금강을 그린 작품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다. 삼선암의 위치와 크기도 조금씩 다르다. 동일한 장소이지만 작가의 의도대로 화면에 도입되는 사물의 위치와 크기를 변화시켜서 그린 작품이 많다.
위 작품 <외금강 삼선암 추색도>(1959)에서 가장 먼저 눈에 두드러지는 점은 진한 검은 먹색이다. 동양화에서는 대체로 볼 수 없는 정도로 진한 먹색이 화면 전체에 퍼져있다. 그런데 이 먹색은 한 번에 낸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계속해서 먹을 올려서 만든 색이다. 그러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변관식은 동양화의 준법이라는 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붓을 놀려 색을 만든 것이다.
다음으로 화면 구도가 동양화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작가의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구도 즉 화면 형식으로 삼선암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면 전체로 감상자의 눈을 이끌 수 있도록 각 사물을 위치시키고 있다. 어쩌면 이런 형식은 현장에서 사생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머릿속에 있는 현장의 감동을 화면에 옮겨내려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화제(畫題)와 다른 시기로 제목을 붙인 무창춘색(武昌春色)
한 폭의 실경 산수화를 보는 듯 하지만, 이 무창춘색은 변관식이 지어낸 허구의 풍경이다. 그럼에도 우리,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이런 경치를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 변관식의 생각으로 그렸지만 우리에게는 사실로 다가온다. 이것이 변관식 작품의 힘이다.
<무창춘색>(武昌春色)이라는 제목(화제) 옆에 제기(題記)는 '을미추 사어완산여차'(乙未秋 寫於完山旅次)로 적었다. 내용은 '1955년 가을에 완산(전주의 옛이름)을 여행하며 그리다'이다. 그러니까 완산을 가을에 여행하며 '무창'이라는 곳의 봄을 그렸다는 뜻으로 실경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을 그렸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6폭병풍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오른쪽 키 큰 나무부터 시작된다. 작은 길을 따라 걷는 남녀에게 시선이 간다. 곧 돌다리를 건너려는 이들은 남자가 앞에서 걷고 여자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뒤따른다. 초가삼간과 맞배지붕을 한 기와집 모두 우리가 예전에 보았던 집들이다. 다리 건너에는 기와집이 있고 그 뒤로 길이 이어진다.
뒷산에는 복숭아꽃이 피었고, 멀리는 성벽이 보인다. 변관식은 아무리 관념적으로 그렸다고 하지만, 없는 혹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니라 익숙한 풍경을 화면에서 자신의 방법대로 재조합하고 있는 것이다. 흔하게 보았던 풍경을 조합해서 그리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을만한 우리의 시골 풍경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 풍경을 그대로 옮겨낸 작품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변관식은 실재 풍경을 거의 그대로 옮겨낸 작품도 제작한다. 아래 설경(돈암동 풍경)은 자신의 작업실이 있던 곳의 겨울 풍경을 그린 것이다.
눈 덮인 동네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런 실재 풍경을 그대로 화면으로 옮겨 낸 작품도 꽤 존재한다. 흔히 변관식의 생애에서 소정양식을 완성해 낸 시기를 해방 이후부터라고 규정하는 논문이 많은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한다. 즉, 전통적인 동양화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화면을 재구성하여 서양화와 다르지 않은 구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설경(동암동 풍경)>은 이런 변관식의 전형적인 작품 제작 형식에 하나이다. 오른쪽 <추경산수>는 실재 경치를 옮긴 작품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장면을 옮겨낸 것으로 우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림이다. 가을바람에 흔드리는 갈대밭에서 홀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을 보면서 옛 정취를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성이다.
이처럼 해방 이후의 변관식 작품은 이상향 혹은 전형적인 남화의 형식이 아니라, 한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자신의 동양화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소개하지 않았지만 변관식이 자주 소재로 삼았던 <단발령>은 옆으로 길게 그린 형식이 많은데, 이런 작품의 특징은 시점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시점으로 그린 탓에 약간 눈이 어지러운 느낌을 준다. 이에 대한 것은 다음에 기회에 글을 쓰려한다.
'소정 변관식'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 했으나, 고독만 남겼다...1편
'소정 변관식'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려 했으나, 고독만 남겼다...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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