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대중에게 2000년에 이르러 거의 멀어진 동양화는 몇몇 작가들에 의해 변신들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그 효과는 미미하게 느껴지지만,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유근택 전시회에서는 그의 작품보다 일반 관람자들이 보인 진지한 태도가 더 감동적이었다. 자신의 감각과 취미를 키우려는 미술애호가들이 늘어난다면 동양화의 옛 영광이 살아날까?
유근택의 작품에서는 지필묵이라는 전통매체를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한지와 먹 그리고 붓은 동양화(이 명칭에 관해서는 아래 글을 읽어보시길 바란다)에서는 기본적인 재료이고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작가들이 이를 벗어나고자 갖은 재료를 가져다 그림을 그린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그런 행위와 의도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하려는 예술의 출발이라고 믿고 싶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라진 '동양화'와 '서화미술회' 시절의 '동양화' - 1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라진 '동양화'와 '서화미술회' 시절의 '동양화' - 2편
국립현대미술관이 동양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지 1백 년이 넘은 시점에서도 자신들의 관점을 정확히 표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의 동양화는 여전히 가야 할 길을 헤매고 있다.
그렇지. 쉬운 말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가 우리에게 온 지 겨우 수십 년이 될까 말가인데.
유근택의 작품도 지필묵이라는 전통매체를 여전히 사용되고 있지만 그리는 형식은 어느 작가처럼 전통을 벗어나려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봄, 세상의 시작>(한지에 수묵채색, 220×200cm, 2024)은 작품 재료 표기에 '한지에 수묵채색'이라고 쓰여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유근택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 흔적이 넘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소위 작품 캡션이라고 하는 기록에는 수묵채색이라고 쓰고 있다.
채색은 서양화(흔히 부르는 명칭으로 따지면)와 달리 동양화에서는 제대로 색을 내는 것이 쉽지 않다. 적어도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집한 색으로는 말이다. 그런데 흔히 동양화에서 표기하듯이 채색이라고 한다면 전통적인 재료를 썼다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별다른 표기가 없으니 그렇게 보인다.
* 보여진다가 아니다. 너무 흔하게 트리게 사용하는 말이라 여기서 한마디 한다. 보'이'다에서 이미 피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다시 '-지다'라는 피동의 의미는 이중으로 쓰고 있는 틀린 말이다. 심지어 일간지 기사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오류이다.
작가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동양화가 아니다. 동양화 재료를 가져다 쓴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에 단지를 걸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하여 젠체하거나 무언가 있는 것처럼 꾸밀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있는 대로 말하면 알아듣는다. 무언가 있는 것처럼 꾸미는 미술은 현대에서 의미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내 인생에 울림을 주는 작품을 보려는 것일 뿐이다. 작가가 강남에 몇십 억짜리 아파트에 살든 성북동에 살든 관심 없다. 작품에 관심과 흥미가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왜, 그는 빙글빙글 혹은 위에서 아래로, 좌우에서 움직임을 느끼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하는 부분이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주변에 넘치는 갖가지 사소한 사물(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물건들)들이 소용돌이 돌듯 화면에 배치하고 있는 그의 이런 배치 방식은 무엇을 말하려는지 궁금한 것이다.
결국 작품이 말하는 이야기가 나에게 어떻게, 무슨 뜻으로 다가오는지 알고 싶기 때문일 뿐이다.
성북구립미술관과 유근택과의 관계
이 전시를 소개하는 책자는 성북동에 거주하며, 성북이 작품 배경이고 삶의 터전인 그의 작품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기획전시를 연다는 취지로 첫머리에 적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성북동에 사니까 유근택 작가 전시를 연다는 말?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뭐 그렇게 예민하게 글 한 줄 가지고 그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공공미술관인데 좀 더 그럴싸한 취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성북동에 사니까 전시를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성북동에 안 사는 작가는 기획전시를 열어줄 의도가 없다는 말밖에 안 된다.
이렇게 폐쇄적으로 공공미술관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공공미술관은 시민을 위해 미적 소비를 즐길 수 있게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런 결과물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성북구립미술관은 안일했다. 하긴 뭐, 국립현대미술관도 제대로 못하는 일을 구립미술관에게 바라는 것이 무리일지 모르지만...
하지만 기획전시라는 것은 어디서 하든, 규모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학예사는 연구하고 그것을 시각화해야 한다.
이와 함께 한 가지 덧붙이면 동양화와 목판의 관계를 '관계성'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애매하다.
관계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부정할 근거를 들어서 말해야 하지만, 정식으로 출판된 도록을 보지 못한 관계로 더 말하기 곤란하다는 점을 밝힌다.
두꺼운 도록에는 기획자의 자세한 설명이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없어도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 제목에는 아침, 새벽, 봄 시간과 관계되는 명사로 지어졌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작은 작품에 붙인 풍경도 그림을 보면 저녁 혹은 가을이나 여름 등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소개 책자에서 한 말처럼 작가가 사는 주변이 시절에 따라 변하는 것을 그렸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마치 150년 전에 파리에서 활동하던 인상파들이 했던 말을 떠 올리게 된다.
인간이 시간을 쫓아 사는 것이 자연의 순리를 따른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복잡계에서 사는 현대에서 한가하게 풍경이 변하는 것을 쫓는 대중이 어라나 될까. 그것에 호기심을 갖는 이는. 그래서 풍경이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인지.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알고 싶은 것 아닐까? 아니 찾아보려고 하는 것 아닐까.
전시장에서 만난 나이 있는 분들의 진지한 얼굴이 떠 오른다.
전시장에 다니는 관람객들이 "변했다".
관객, 관람객, 미술애호가, 수용자 등 여러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쉽게 호칭을 관람객으로 통일한다.
최근 국공립미술관과 갤러리를 조금 다니면서 느낀 것은 관람객이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연령층도 대략 중년 층이 많지만 젊은 층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전시장이 썰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방문객 세계 20위라든가 그러니, 변하긴 변했다.
그 관람객은 무엇 때문에 전시장을 다닐까? 아니 교통 불편한 성북구립미술관을 왜 찾아왔을까?
그림 보러 온 분명한 목적이 있는 곳이지만 왜 하필 성북구립미술관이냐는 것이다. 지질한 질문인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관람객도 이제 안다는 것이다. 좋은 그림과 껍데기 그림을 슬슬 구분할 줄 안다는 말이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적어도 노력한다는 말이다. 예전처럼 그냥 걸어 다니며 그림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 진지하게 작품에 다가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관람객이 변했다.
이제 관람객도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찾아다니며 즐길 줄 안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적어도 남들이 좋다는 전시는 가본다. 관람 이후에 좋다는 여타의 의견에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이제 이들은 자신의 미적 취미를 찾으려는 자세를 갖춘 것이다.
그러면 작가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 더 진지하게(다른 표현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 넘쳐나는 소재주의 작품으로는 변한 관람객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예쁘게 그린 포스터나 일러스트 같은 그림은 잠깐 보기는 좋지만, 깊은 울림은 줄 수 없다. 천년이 석굴암 본존불이 주는 엄숙함, 섬세한 조각과 색을 표현한 청자가 가진 황홀함, 절제된 감정과 겸손을 내포한 백자가 주는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현대미술이 저런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얄팍한 기술로는 변한 관람객에게 호응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유근택은
충남 아산 출생이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는 성신여자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제직 중이다. 전통 동양화의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담론과 격식을 벗어나 인간과 밀착된 일상의 풍경을 주제로 하여, 일상 속 지금 여기에 주목하고 있다. 일상은 단순한 구조가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세계로 일상적 감성과 정서를 실험적인 재료와 화면으로 표현하여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공립미술관의 어느 학예사 글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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