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1925년부터 29년까지 일본 유학을 다녀온다. 일본에서 소위 신남화풍을 습득하고 돌아온 그는 미술계 활동보다는 명승지를 다니며 사생을 위주로 제작형식을 취한다. 사생을 바탕으로 한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제작에 주된 소재가 된다. 이런 상황은 1953년 한국전쟁까지 지속된다.
1920년부터 일본을 유학하고 귀국한 1929년까지
이 시기에 변관식은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작품을 출품했다. 민족의 역사적 전통을 새롭게 찾으려는 동양(중국이 아니라 이상향으로서 동양) 개념이 삽입된 동양화로 진전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들의 화풍과 조선에 유입된 일본화풍의 영향도 동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서양화가들이 들어와 작품 활동을 직접 볼 수 있었던 시기이므로, 서양화의 영향도 어느 정도는 미쳤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은 변관식만 아니라 이 시기에 활동하던 여러 동양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화의 영향은, 미술이라는 장르의 특성으로 당연한 부분도 있지만,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 혹은 실제풍경을 사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색의 농도를 조절하여 원근법을 표현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변관식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제작 태도는 동양과 서양의 화법을 혼합하여 새로운 산수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특히 서양화에서 사생을 통한 제작방법은 변관식이 보통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비롯해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제작방법이다. 변관식은 이를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태도는 서회미술회 출신인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와 동연사(同硏社) 회원도 비슷하다. 각 개인은 이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동연사라는 단체는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곧바로 해체하고 별다른 활동도 하지 못하고 해체한다.
한편 이 시기 변관식의 작품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유학을 초청해주기도 했고, 스승이 되기도 한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의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고무로 스이운은 일본의 '신남화'(新南畵) 운동에 참여한 작가이다. 신남화는 남화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표현과 정신을 서양화에서도 찾아내 이를 반영하고자 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서양화의 명암법, 인상주의 점묘법, 입체주의의 입방체적인 표현 등을 동양화에서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들어 이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고무로 스이운은 더 나아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마음과 철학이 담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라고 한다. 신남화의 조형적 특징은 분절된 구도, 강렬한 흑백대비, 미점 사용 등 전통적인 산수화에서는 보기 힘든 양식을 적극 도입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고무로 스이운은 점차로 조형적인 그림이 아니라, 정신적인 그림을 강조하는 즉 남화의 정신성을 다시 상기하고 강조한다. 이런 특징은 전통적인 남화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성을 다시 되살려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명승지를 다니며 사생에 몰두하다.
이 시기 변관식은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지 못하는 미술계 풍토와 향토주의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조선적인 것을 찾자는 운동이 유학 이전의 미술계와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지 않았다.
이 시기 김은호, 허백련 등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가는 등 변관식은 광산, 진주 등 여러 곳을 다녔다. 이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명승지를 직접 보고 체험하여 그 감동을 작품으로 옮기는 서양화풍의 제작형식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풍경을 그대로 옮겨오는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잘 알려진 것은 1934년에 전라도 광산에 가서 제작한 수촌 6폭 병풍, 하경산수 6폭병풍 두 점이 있다. 1934년 전라도 광산의 유지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들은 서로 비슷하면서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서양화에 영향을 받은 모습도 보이고 일본인 스승인 고무로 스이운의 신남화풍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하경산수 6폭병풍>은 오른쪽 아래에 난 작은 오솔길로 시작해서 마을 앞으로 지나 산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울창한 숲이 자리한 구도를 가진 작품으로 실경을 소제로 하지만,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감상자의 시선을 화면 전체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남종화의 관념산수와 일본의 신남화풍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실경과 이상적인 경치를 혼합한 풍경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오른쪽 상단에 쓰인 제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림 그리는 것에 법(法)이 있으면서 이치(理)가 없어서는 안 되고, 이치가 있으면서 취미(趣)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림에는 따라야 할 법도가 없다. 사물은 따라야 할 이치가 있으나 취미에는 따라야 할 것이 없으니,
붓끝에서 나와 신묘함에 이르러야 한다.
녹대선생(蔍臺先生 : 왕원기)이 말하기를 "대저 그림 그리는 길(道)은 옛 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옛 법과 내 손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붓끝은 금강저와 같은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마음에서 얻어 입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임제의 일갈처럼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아야 한다.
남의 말만 듣고 그대로 따르는 자는 어찌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갑술년(1934) 봄날 광산(光山)을 여행하던 차에, 소정 변관식
<수촌(水村) 6폭병풍>은 실경을 바탕으로 관념적 구도가 보이는 작품이다. 산세나 수목의 세부적인 처리 기법에서 사생의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속에 자리한 초가집이나 작은 인물은 중국풍을 벗어나 한국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물길을 따라 시점이 화면 중심부로 빠지게 하면서, 근경과 중경 멀리 원경까지 도달하게 한다. 근경에서부터 원경까지 소홀함이 없이 구석구석 세밀한 필치로 마감하고 있다.
아래 작품은 4월 24일 케이옥션에 출품되는 것으로 추정가는 700만 원에서 15백만 원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48년에 그린 것으로, 금강산이나 시골 풍경이라기보다는 도화류수(桃花 流水)라는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도 보이듯이 이상적인 풍경보다는 사실 풍경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이 작품가격의 추정치는 그동안 나왔던 추정치보다는 다소 높게 책정되었다는 것은 제작연도가 오래되었고, 비교적 작품 크기도 적당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동양화는 경매시장에서 외면받아 온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장감 있는 실경을 소재로 작품과 해방 이후
현장감이 강조된 작품으로 명승지가 아닌 평범한 풍경을 그린 작품도 꽤 존재한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을 심원과 고원의 적절하게 혼용해 폭넓게 묘사하고 있다. 완만한 산세를 가진 산의 능선을 따라 소나무와 분홍색을 띠는 복숭아와 사과나무를 그렸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초가집과 연두색 싹을 그린 근경의 나무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변관식은 관념미와 실경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적절히 혼합하여 자신만의 산수화를 완성해 나간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변관식은 미술계의 주요 활동에 참여한다.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큰 과제인 일제 잔재청산과 민족 미술의 정립이 대두된다. 한편 한국적인 미술을 창출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 대표적인 주장으로 수묵화가 나아갈 방향을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계승하여 시대를 반영한 화풍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짙은 채색과 고운 선의 사용 그리고 과도한 호분의 사용을 철저히 배제하고자 했다. 이는 왜색의 영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변관식은 사생을 바탕으로 실재 풍경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을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채 1950년 한국전쟁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변관식은 어릴 적 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졸업했기에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생소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간 변관식은 대한도기 회사에서 접시에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는 김은호, 장우성, 김환기 등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대 그린 접시 대부분에는 그린 이의 서명이 없다. 하지만 변관식은 자신의 호와 제작연도까지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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