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지난 3월 26일 8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스페인 마요르카 섬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민한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 조선소에서 배관공으로 일했다. 4살이 되는 생일날에 아버지를 따라 거대한 유조선 진수식을 본 세라는 이 기억이 자신의 예술세계의 원천임을 밝혔습니다.
1. 리처드 세라의 교육 배경과 초기 작품
배관공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인 어머니 사이에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라의 그림에 큰 인상을 받은 선생님이 그의 어머니에게 박물관에 데려가라는 말을 듣고 어린 세라에게 그름을 그리도록 격려를 받았다고 알려진다. 1957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일 년을 보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로 전학했다.
이곳에서 영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이곳을 졸업하고 세라는 계속 영문학을 전공하려는 생각을 가졌지만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사 학위를 취득하고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샌프란시스코 제철소에서 지속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몇 장의 회화 작품을 제출해 예일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유럽으로 갔다.
이곳에서 유럽의 여러 작가들 특히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스튜디오를 탐방한 뒤에 회화에서 조각으로 진로를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유럽에 있는 동안 세라는 비전통적인 조각재료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조각은 무엇을 외부로부터 깎아내는 것, 소조는 안으로부터 붙여서 만들어내는 것을 합쳐 조소라고 한다. 즉 조각과 소조의 합성어로 조소라고 하는데 흔히 일상적으로 조각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틀린 용어이다.
따라서 이런 전통적인 기법에 벗어난 제작형식을 리처드 세라는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6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고무 일종인 라텍스, 유리섬유, 네온과 납 등으로 재료를 실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리처드 세라의 작품 중에서 녹은 납을 벽면에 던져서 식은 뒤에 떼어낸 작업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인지된다. 이것은 결과물로 조각자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혹은 제스처가 의미 대상으로 또 오른 작품이 된다.
즉 현대미술의 특징에 하나인 것처럼 결과물이 해석의 대상이 아닌, 작가의 행위가 의미 해석대상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조각의 해석 방법으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 첫번째로 스캔들 대상이 된 리처드 세라의 작품
켈리 그로비어 (Kelly Grovier)가 BBC에 기고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중에서 4번째로 소개했던 작품이 바로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과 스캔들을 일으킨 미술품 10점 - 3편
1980년대 <기울어진 호>와 거대한 철판 작업이 나오기 전 그러니까 70년대 리처드 세라의 작업이 납을 뿌리는 방법과 그 중간 과정에 그만의 작업형식을 형성하게 하는 계기가 있다.
69년, 70년 그는 사각형 철판을 벽면에 서로 맞다는 부분에 기대어 세우는 작업을 한다. 무게 때문에 위험한 것은 아니만 시각적으로 매우 위험해 보이는 작품을 발표한다. 그리고 이어서 두께운 사각형 철판을 쌓다가 무너뜨리는 작업을 발표한다.
1969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미술과 기술(Art and Technology) 전시에서 크레인으로 9에서 12m에 달하는 높이로 강철 덩어리를 쌓아 올리고 허무는 작업을 발표한다. 무게가 60~70톤에 달하는 강철을 인부들과 함께 매일 쌓았다가 일과가 끝날 즈음에 허무는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세라의 작품은 실내에서 실외로 나오게 된다.
1970년대는 미국에서 대지미술(Land Art 혹은Earth Works)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대지미술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인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 , 1938~1973)이 유타주 그레이트 솔트레이크에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를 제작할 때 리처드 세라도 협력자로 참가했었다. 그해 하반기에 6개월을 일본에서 보냈는데 리처드 세라는 여기서 교토의 정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리처드 세라는 이 두 가지를 계기로 자신이 하는 철 작업에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다. 처음 자신이 철을 재료로 하는 작업은 가장 전통적인 재료라는 생각 때문에 주저함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철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이전의 작가들은 철의 구조력과 무게, 압축, 질량, 철의 정체성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즉 재료가 가지고 있는 본질에 대한 개념을 상기하게 된 것이다. 철은 산업 재료 혹은 건축물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쓰임새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철이라는 본성을 드러내는 형식은 아니다. 따라서 철이 가지고 있는 본질, 철의 구조를 드러내는 성질을 표현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작업에 집중하다가 그는 1980년 경에 강철판을 구부리면 스스로 서있을 수 있다는 것, 즉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복잡한 수식을 통한 구조계산이 필요했지만, 기울어지거나 구부러진 강철판은 안정적으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런 확신으로 세운 작업을 발표하고, 그 시련은 1981년 뉴욕에 있는 페더럴 플라자(Federal Plaza)에 세운 <기울어진 호>에서 나타난다. 이 작품은 법원으로 가 배심원에게 철거를 명령받고 결국 철거되고 만다. 리처드 세라는 이 작품이 철거되면 뉴욕을 떠나겠다고 했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3. 빌바오 구겐하임에 <The Matter of Time> 영구 설치되다
1997년에 개관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의뢰로 1994년에부터 2005년까지 설치한 리처드 세라의 작품 <The Matter of Time>은 8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시리즈 작품이다. 개관 이전부터 의뢰를 받은 리처드 세라는 10여 년에 걸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8개의 작품은 서로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일 타원, 이중 타원, 닫힌 작품, 열린 작품 등 한글로 번역하기 쉽지 않은 형식이지만, 각 철판이 혼자서 서있도록 구조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만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세라의 작품과 작업에 관해서 현대미술의 난해한 다양한 해석으로 이해하기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리처드 세라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재료로 전통적인 조각형식을 탈피하고자 했던 결과물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 이상의 해석은 관람자의 몫이고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와 일면식도 없고 아무 관계는 없지만 이 세상에 좋은 예술을 남기고 간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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