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은 우리 근대미술 태동에 있어서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 1853~1920)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관료이자, 도화서 화원이자, 동양화가였다. 고종이 나라 부강책으로 중국으로 파견한 영선사의 유학생으로 가기도 하고, 어진화사로 또 서화미술회 교수로 활동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은연자중하며, 서화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안중식이 미술에 입문한 불확실한 계기와 중국으로 유학을 가다
조부 때부터 무과에 진출한 중인 가문(사대부 가문이라는 설도 있음) 출생으로 알려진 안중식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는 집안 친척의 증언이다. 먼 친척이었던 도화서 화원 안건영(安建榮, 1841~1876)에게 어릴 적 그림을 배웠다는 설과 장성하여(1882년 부터)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에게 사사했다는 설이 있다.
오원 장승업이 누구인가? 도화서 화원이었으며 높은 예술성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그의 기질이 분방하여 한 곳에 머물기를 꺼려하여 갖가지 기행으로 유명했다. 이런 탓에 '취화선'이라는 임권택이 감독한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안중식은 당대 최고의 도화서 화원으로 이름이 펴져있던 안건영과 장승업과 어떤 형식으로든지 관계를 가지고 그림을 배웠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고종(13년)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근대적 국제조약인 강화도 조약(1876)을 체결하고 문화를 개방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평등 조약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청을 배워야 한다고 여긴 조선은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1873년부터 파견하고 있었다. 이 신사유람단을 1881년에 3차로 파견하면서 같은 해 청에도 영선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 영선사는 청나라 텐진 군수창에 무기 제조법 등을 배우기 위해 대규모로 젊은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 이름이다. 여기에, 조석진과 안중식이 학도의 신분으로 텐진에 있는 남국학당 화도창(畫圖廠)에 배속되었다. 무기제조법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아마 무기 제조를 위한 설계도면을 작성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특히 안중식이 백악춘효에서 보여준 원근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타당한 논리이다. 하지만 영선사는 1년 만에 되돌아오는데, 표면적으로는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안중식이 그림을 장승업에 배웠다면 바로 청에서 돌아온 이후인 이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884년 우정총국(우편, 통신을 담당하는 기구) 처음 관직에 나아간다. 하지만 그해 우정총국 낙성식에서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1884)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안중식은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설과 지방으로 피신했다는 설이 있어 분명하지 않다.
드디어 도화서 화원으로 나서다.
익종의 비인 대왕대비 조씨(1808~1890)가 승하함에 따라 ≪문조신정후가상존호도감의궤≫(1890) 제작에 친구 조석진과 나란히 화원으로 나간다. 갑신정변 이후 아마도 조용히 서화에 매진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6년 만에 관료에서 화원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도화서 화원은 계약직과 비슷한 직업이므로 의궤를 마치고 1891년 안중식은 중국으로 떠난다. 그의 나이 31세로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 서화가들과 교류했다. 기록에 의하면 상해에서 화보(화집)와 많은 직업 작가들과도 교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학계 연구로는 1892년에 귀국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안중식은 뜬금없이 경기도 양평군 지평현감으로 임명된다. 이때가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난 해로, 조선에 대한 간섭을 청과 일본이 논의하다 협상이 결렬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해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때 갑신정변에 실패했던 김홍집 등이 돌아와 정권을 잡게 되고, 아마 이 시기에 개화당 일원이었던 안중식에게 현감이라는 관직이 부여되었던 것 같다.
갑오개혁은 3년 동안 지속되어, 1897년 드디어 국호를 <대한>으로 명명하고 고종은 황제로 등극한다. 하지만 안중식의 관료 생활은 1년 반 만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안중식은 1899년 다시 중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중국 상해 등지를 여행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해 여러 곳을 여행하고 중국 상해로 출국했다가 귀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중식은 이미 지평현감 시절에 당주동 자택에 경묵헌(耕墨軒)이란 당호를 짓고 자신의 방을 개방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 돌아온 1900 혹은 1901년 관제 이도영(貫齋 李道榮, 1884~1933)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최초로 양화를 배우기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간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도 이 시기에 만나게 된다.
1902년 어용화사가 되다.
1902년 고종황제 등극 40주년을 기념하여 어진과 황태자 예진을 제작하기 위해 '어진도사도감'을 설치하고 여기에 조석진과 안중식이 화원으로 나가게 된다.
어진도사 사업을 마치고 주관 화원을 맡았던 포상으로 조석진은 영춘군수로, 안중식은 통진군수로 지방관직에 임명된다. 안중식은 유능한 지방 수령으로 이름이 나, 정부는 1904년 이웃 군수를 조사하는 임무까지 맡겼다. 이 수령직을 1907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교육자이자 화가로 진출하다.
안중식은 1907년 '교육서화관' 발기인회에 참석한다. 관장은 김규진, 참석자는 안중식, 양기훈, 이도영 등이며 과목은 서예, 회화, 사진, 음악이며 입학생은 10~15살로 제한된 말하자면 청소년 종합 예술교육기관이었다. 이 시기에 근대적인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이런 예능교육기관도 등장하게 되었고, 안중식이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교육자로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라고 불리는 한일병합조약이 8월 29일 반포되면서 고종황제는 강제퇴위되고 대한제국도 사라지게 된다. 즉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 근대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열망에 가득했던 시기였다. 기울어져 가는 청나라와 떠오르는 일본을 보면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주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지식인들은 많은 노력을 했다. 동학농민운동도 이러한 노력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교육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신문사를 세워 민중의식을 깨우려는 지식인들이 계몽운동을 펼쳤고, 중화(中華)라는 이념을 중국이 아니라 동양, 즉 서양에 대응하는 동양이라는 이념을 창출하고 역사를 일깨워 민족의식을 드높이고자 했다.
즉 사회적으로는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찾고, 그 연원은 중국이 아니라 동양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전통 사상을 이어온 서화와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동양이라는 거대한 이념을 담은 매체 즉 동양화를 위해 교육기관을 양성하고자 했다고 하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지 모른다. 하지만 안중식, 조석진을 비롯한 오세창 등은 은연자중(隱忍自重)하며 실력을 배양하여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이들이다.
이에 1911년 서화미술회가 탄생하게 된다. 이에 관한 과정은 매우 복잡하여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려 한다. 일단 간단히 서술하면 이왕직(대한제국이 사라지고 격하된 이왕가의 사무를 보는 기구)과 조선총복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교육기관이다. 따라서 개인 교습소도 그렇다고 공식적인 공립교습소라고도 할 수 없는 교육기관이었다.
여기 교원으로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 1855~1921),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 1853~1920), 위사 강필주(渭士 姜弼周, 1860?~1930?), 관제 이도영(貫齋 李道榮, 1884~1933)을 비롯해 객원 교원으로 당시 유명 서화가들이었다.
교습과정은 서(書)과와 화(畵)과로 구분되었고, 수업 기간은 3년이었다. 졸업생으로는 정재 오일영(靜齋 吳一英, 1890~1960), 춘전 이용우(春田 李用雨, 1902~1952),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심향 박승무(深香 朴勝武, 1893~1980),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1899~1978), 정재 최우석(鼎齋 崔禹錫, 1899~1965),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등이다
이 졸업생들은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동양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니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심전 안중식이 <백악춘효>를 그릴 시기인 1915년
이미 앞에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기 위해 경복궁에서 4천 칸이나 덜어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 1915년에 미술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진회에서 미술전람회 공모전을 개최하여 33인 조선인 작품 57점을 모두 입선을 시킨다. 심사위원은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안중식도 일본화부에 응모하여 금패없는 은패를 수상한다.
일본 황족은 이때 공진회에 참석하여 안중식 등의 작품을 구입해 주고, 여관에서 휘호회도 개최한다. 일면 당근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미술인은 실력을 양성하여 대를 기다린다는 은연자중이라는 사자성어를 실천 중이었다는 학술 연구도 있다.
이런 시기임을 감안하고 다시 <백악춘효>를 들여다보자
1편에서는 눈에 보이는 차이점에 대하여 밝혔다. 물론 여기서도 눈에 보이는 차이점에 관해 논의할 것이지만 보다 면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들이 중심이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비슷한 구도처럼 보인다. 사실은 아주 유사하지만, 반면에 차이가 크기도 하다. 여름과 가을에 그렸다는 점과 해태상이 가을본에서는 하나가 사라졌다는 점을 빼더라도 이 두 작품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아니 어쩌면 안중심의 심경은 더 나라 잃음 슬픔이 더 사무쳤는지도 모른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기울어 가는 국운처럼 가을본에서 그런 기운을 느끼게 된다.
여름본 가장 앞 좌측에 있는 나무 가지와 가을본을 비교하면 가지 하나하나가 같다.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산의 공제선을 보면 이것도 거의 같다. 이것은 여름본을 보고 가을본을 그렸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두 작품은 시선의 각도가 살며시 다르다.
여름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시각이고, 가을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라본 시각이다. 해태상의 좌대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검은색으로 된 현판을 가진 광화문도 문 안쪽을 보면 오른쪽이 살짝 보인다. 당연히 가을본은 왼쪽이 보인다.
광화문에 뒤에 그려진 지붕을 보면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안중식이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 갔을 때, 제도를 배웠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가 얼마나 원근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백악춘효가 서양식 원근법을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웅장한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드는 원근법은 오히려 동양화가 훨씬 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웅장한 산과 건물을 동시에 같은 화면에 넣기 위해서는 동양화가 이용하는 심원법이 훨씬 유리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건물을 서양식 원근법을 사용하고 배경인 산과 가운데 풍경을 조합하는 데는 심원법을 사용해 감상자에게 한눈에 광화문과 경복궁이 보이게 그렸다.
심전 안중식의 화재가 뛰어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19년 3.1 민족해방운동은 당시 서화가들에게 존경받던 오세창이 참가하였다. 위창은 심전에게도 이를 알리고 함께 하기를 권유했는데 심전은 이때 가지고 있던 돈 모두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3.6일 심전 안중식은 일경에 체포되었고, 20여 일이나 고초를 당한 뒤 풀려났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1919년 11월 2일 휴양을 갔던 시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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