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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1편

by !))*!))* 2024. 2. 24.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장르임에도 저평가된 동양화가들은 많고, 이런 현상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레트로니 복고풍이니 하는 현상에도 동양화는 여전히 외면받고 있다. 그러나 변할 것이고 작품가격이 오르는 고평가 될 때가 올 것이다.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첫 번째로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김은호의 장안에 최고 초상화가가 되다.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는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한국 근현대 시기의 대표적 동양화 작가이다. 어진화가로 불렸을 만큼 그의 그림은 해방 전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21세기초부터 최근까지도 사라질 정도에 이르렀다.

 

흔히 채색화라고 부르는 북종화(북화)는 김은호가 없었다면, 이 부분은 우리 미술계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근현대 화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이다. 하지만 동양화에 대한 외면과 김은호의 개인 역사에 따른 친일화가로 낙인찍히면서 미술시장에서는 거의 거래가 안 되는 작가가 되었다. 당연히 평가가 이러니 작품값은 형편없다.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작품값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저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당의 생애와 작품에서 이런 점이 무엇일지 알아보고,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본다. 전제가 길었다. 이제 이당이 동양화에 입문한 계기부터 장안에 최고 초상화가가 되기까지 먼저 알아본다. 

 

- 동양화에 입문하게 된 계기

인천에서 태어난 김은호는 어린 시절 집안이 파산하여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지만, 1908년 기술학교인 시립인흥학교에 측량과 1년 단기과정을 마쳤다. 여기서 측량이라는 기술에 주목해야 한다. 땅의 모양새를 축척하여 종이에 옮기는 것으로 입체를 평면으로 옮겨내는 기술이다. 여기에 원근법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그림이라는 것은 3차원 입체를 2차원 평면으로 옮기는 기술이므로, 이당은 기본적인 미술소양을 여기서 배웠다고 해도 전혀 틀린 주장은 아니다.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모사라는 기법도 있다. 그대로 도면을 옮겨내는 방법도 여기서 충분히 습득했을 것이다. 동양화 특히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본을 만들고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는 방법을 사용하므로, 이 역시도 동양화에 입문하기에 좋은 기술을 이미 습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 인천은 개항 항구로 일본과 서구로부터 신문물이 들어오는 입구로 사진기, 축음기, 초상화 등 김은호는 경험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측량과를 나와 여러 일을 하다가, 안국동 영풍서관에서 책을 모사하던 일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 영풍서관을 드나들던 당시 중구원 참의였던 김교성(1860~1943)이 김은호의 세필 필사 솜씨를 알아보고 서화미술회(도화서가 사라지고 관변 설립(이완용이 회장으로 있으면서 후원했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양화 학교이다. 우리 근대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학교로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겠다.) 서화미술회의 화사(현재로는 교수)로 있던 심전 안중식(1861~1919)에게 소개한다.

 

이를 계기를 학기 중간인 1912년 여름 서회미술회 화과(畵科)에 입학한다. 화과 3년, 서과(書科) 3년 과정을 5년 만에 졸업한다. 서화미술회는 근대적인 미술학교라고는 하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자원화보를 모사하거나 스승에게 서화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김은호는 1915년 전후 순종의 초상사진을 엽서크기로 모사한 것과 1915년 8월 순종의 대원수군복 반신상을 그려 서화미술회를 다니면서 장안의 최고 초상화가로 떠올랐다.

(아래 작품은 1915년에 제작한 것이 아니고 1923년에 제작한 것임을 참고바람)  

이당 김은호의 순종 초상 초상
김은호, 순종어진 초본, 59.7×45.5cm, 기름종이, 192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서울 장안에서 최고의 초상화가로 등장하다.

1920년에는 서화미술회에 함께 수학했던 이들과 창덕궁 재건 벽화작업에 참여해 대조전 서벽에 '백학'(학과 달)을 완성했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5개월(6개월형 선고)을 복역했다. 1920년 2월에 석방된 김은호는 몸이 쇠약한 몸으로 궁중의 전통적인 채색법에 따라 화려하고 밝은 작품을 같은 해에 완성해 냈다. 

창덕궁 대조전 서벽에 그린 백학도
창덕궁 대조전 서벽 백학도

김은호는 이제 어진화가라는 이름과 궁중의 백학도를 제작하여 궁중작가(나라가 없어져 공식적인 화가는 없어졌지만)라는 타이틀로 인기가 높아졌다. 이후 여성 인물화를 제작하여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하였고,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는 '미인 승무'를 출품하여 4등상을 수상하였고, 2회, 3회에도 출품해 연속으로 입상하게 된다.

 

1924년 동서양 그림을 모두 가르치는 고려미술원이 설립되어 동양화는 김은호와 허백련(1891~1977), 서양화는 강진구(미상)와 이종우(1899~1979)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동양화는 김은호가 주로 연구생을 가르쳤다. 이렇게 나날이 김은호의 인기가 높아지자 주변에 시기심도 일어나고 마치 고려미술원도 문을 닫자, 고려미술원 운영에 협조했던 이용문(丹字 李容汶)의 도움으로 1925년 소정 변관식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뜻밖에 만난 소정 변관식 초기작품(192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뜻밖에 만난 소정 변관식 초기작품(192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동산 박주환이 수집하고 그의 아들 박우홍이 기증한 동양화 209점을 전시하고 있다. 동양화 전시가 국공립미술관은 물론이고 사립미술관에서도 보기 힘든 장르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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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유학 목적은 동경미술학교를 염두에 두고 건너갔지만, 김은호는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의 문하에 들어갔다. 유키 소메이는 동경에서 태어나 동경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다시 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했다. 이런 영향인지 초기에는 사생적인 화풍에 서양화 형식을 도입한 작품을 그렸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당 김은호가 서양화풍의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유키 소메이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다만 그가 남종화에도 일가를 이때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시기에 제작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으로는 간성(1927)이 있다.

이당 김은호 간성
김은호, 간성(看星), 138×86.5cm, 종이에 채색, 192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제6회(1927)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으로 여성을 주제로 일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평가한다. 조선미술전람회가 시작된 초기만 하더라도 여성을 그린 작품은 흔치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은 드물다. 하지만 상업활동이 많아지고 자본이 쌓이게 되면 부유한 이들은 유흥적인 소재를 찾기 마련이고, 그림도 조금씩 화사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시대가 항상 그림에 반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도 에도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우키요에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가부키라는 연극을 홍보하기 위한 것에서 출발하여 에도인들이 점점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하자 우키요에는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늘어난다. 김은호에게 1920년대 후반부터 서울에서 여인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주문하는 이가 늘어나는 것을 감안해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일본 유학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별점을 본다는 의미인 ' 간성'(看星)은 분홍 저고리와 옅은 청색(채색화로 시간이 많이 흘러 아마도 색이 많이 탈색되었을 것을 감안하고 보아야 한다)을 입은 여성이 대청마루인 듯한 곳에서 돗자리 위에 앉아, 골패를 이용해 하루 운세를 점치고 있는 모습니다. 옆에는 재떨이 위에 불 붙인 권련이 그 옆에는 성냥이 무심코 놓여있다. 

 

여인의 머리 위에는 나팔꽃인지 덩굴 식물의 잎이 무성하고  조롱 속에 흰색 새가 한 마리 앉아있다. 이것이 특별할 것이 없는 작품 구성이다. 하지만 청홍색과 배경에 초록의 색 구성과 조용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소품의 등장이 그의 화재가 뛰어나다는 것을 감지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왜색의 영향으로 꼽는 물체의 외곽선이 매우 가늘고 일정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상을 그대로 옮겨야 하는 초상화가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리는 작품이므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어쩌면 모델을 채용하여 드로잉(본)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조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선의 유무에 따라 왜색이라고 하기에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이미 1800년대 후반에 이르면 동일한 선으로 인체의 외곽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이 사라진다. 특히 우키요에는 서양화의 원근법을 받아들여 작품에 몰골법도 필요에 따라 적용시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왜색으로 재단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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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호분 사용도 왜색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호분은 동양화에서 흰색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재료이다. 사실 동양화 특히 채색화는 흰색을 표현하는데 호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얼굴이나 손 등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호분의 사용이 과하게 눈에 띄거나 어색하지 않다. 이 부분도 앞으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하여 재설정할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김은호의 작품에서 전혀 일본화풍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후에 일본 동경미술학교 교수까지 역임하는 유키 소메이에게 3~4년을 배웠다는 것을 감안하고, 동경에서 생활하며 여러 경험을 했다면 그런 영향은 전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향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을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작업 자세와 어떤 예술세계를 지향했는지를 밝혀 내는 게 더 중요하다. 그 속에서 일본의 영향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 단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입체를 평면으로 옮기려면 결국 비슷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최종 정리된 것이 서양화에서는 원근법이고 동양화에서는 삼원법이다.        

 

최근 이당 김은호의 경매결과에 대하여 잠깐 알아보자.

'향로'라는 작품(아래 흑백)은 1937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분실되었고 1960년에 이당이 다시 그린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22년도에 24백만원에 낙찰되었다. 최근에 낙찰된 것은 유사한 작품이지만 크기가 다른 같은 소재의 작품은 12백만원이었다. 

김은호 향로
김은호, 향로, 비단에 채색, 1960년

 

김은호 향로 1937
1937년작인 향로

 

 

관심이 있다면 김은호의 채색화에 대한 또 다른 글은 아래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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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김은호 2편에서는 낙청헌에서 90년대까지 동양화단 중심을 형성하는 제자를 육성하다로부터 시작한다.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2편

- 낙청헌에서 '후소회'를 조직하게 되는 제자를 육성하다.(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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