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 낙청헌을 개설하여 제자양성에서부터 절정기에 오른 김은호의 작품세계를 알아본다. 해방 이후 친일시비와 일본화풍이라고 외면받았지만, 다시 그의 작품은 인기를 얻게 된다. 특히 삼성 이병철 회장의 집무실에 이당의 작품이 여러 점 걸려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실화이다.
낙청헌(絡靑軒)을 열고 인기는 더 높아졌지만, 일제의 회유에 굴복하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당은 종로구 권농동으로 이사하고,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지어준 이름 '낙청헌'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작품제작과 후진 양성을 위해 화숙(畵塾, 화실의 일본식 이름)을 운영한다. 이들은 후에 '후소회'를 조직하고 1980년대까지 한국 동양화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 화숙 낙청헌에서 제자를 키우다
처음 들어온 제자는 백윤문(白潤文, 1906~1979)이다. 이어 김기창(金基昶, 1914-2001), 장우성(張遇聖, 1912-2005 ), 이유태(李惟台, 1916-1999) 등이었다. 이들은 김은호에게 도제식으로 동양화를 배웠고 제자들이 늘어나자, 친목도모와 미술계 진출을 목적으로 후소회를 조직하여 동문전을 열고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낙청헌 이외에도 김은호는 곧 문을 닫았지만, '조선미술원'과 개인적으로 투자해 문을 '이묵헌'이라는 서화 애호가들이 드나들던 사랑방 같은 곳을 개설할 정도로 교육에 열정을 보이던 시기였다.
1928년 일본에 귀국하고 1929년에는 북경여행을 의재 허백련( (毅齋 許百鍊, 1891~1977)과 함께 두 달 동안 다녀왔다. 이 시기의 김은호의 화풍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이미 초상화와 채색화에 관해서는 장안에 이미 일류 작가로 정평이 나있었고, 남종화와 회조화를 혼용해서 제작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서화협회 시절에 남종화풍을 열심히 익혔기에 김은호는 글이면 글, 남종화, 북종화 할 것 없이 모두 잘 그렸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당연히 그의 화풍에도 미세한 변화가 보인다. 물론 순종 어진을 그릴 때 사진을 이용하였기에 새로운 문물 혹은 방법을 배우는데 거리낌 없는 김은호였다. 일본에 유학을 가기 이전에 조선미전에 미인도를 주로 출품하기도 했지만, 일본 관전인 '제국미술전람회'에 <탄금(彈琴), 1927>과 <춘교(春郊), 1928>를 출품하여 입선을 한다. 이 작품들 소재는 한복을 입은 여성이거나 아이들이었다.
여하튼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일본화의 영향을 세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간결하고, 보다 세밀한 기법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도입하면서도 화면은 매우 경쾌하게 구성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화미조도>(畵眉鳥圖)는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1926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제작연도가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작품은 새가 나뭇가지 끝에 앉아있는 풍경으로 정제된 화면과 매우 세밀하게 묘사한 것이 눈에 띈다. 배경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사군자를 그리는 제작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세밀하게 묘사한 것을 보아 일본화풍의 영향을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필요한 것으로 일본화가 서양화에 영향을 받은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일본화풍의 영향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사물에 대한 사실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그것을 화면에 옮겨내려는 의지가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여러 사정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지 않고 제자 양성에 힘쓰면서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한다. 이미 장안의 최고 화가가 된 마당에 선전에 출품할 필요성도 없었고, 작품 제작주문이 밀려들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드세지면서 동양화단에 가장 영향력 있는 김은호를 일제가 그대로 두고 보지는 않았다.
일제는 드디어 김은호를 회유하기 위해 선전에 1937년 '심사원 참여'라는 것으로 심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거의 명예직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자들을 입상시키는데 약간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이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영향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다.
일제는 동양화단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김은호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전에 심사원 참여를 계기로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에 시작된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김은호는 일제에 협조하기 시작한다.
김은호 친일을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1937년 11월에 제작한 <금차봉납>이다. 김은호의 이런 행동은 일본이 문화예술로 독려하기 위한 행사에 심사위원 혹은 작품을 출품하는 일은 해방될 때까지 계속된다.
- 1945년 해방이 되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 혼란을 피해 안성으로 이주했던 차에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창설되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금차봉납>이 빌미가 되어 소외당하게 된다.
위 산수도는 김은호가 54세 때 그린 6폭 병풍이다. 각 폭이 모두 연결된 형식을 취한 작품으로 동양화 치고는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동양화 작법은 많이 사라지고, 서양화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작법이 많이 보인다. 특히 원근법을 위해 가까운 곳은 세밀하게 묘사하고 원경은 운무에 가려 공기의 흐름으로 인한 원근법을 조성하고 있다.
김은호의 산수화는 점점 과감하게 변해서 60년대에 이르면 선은 사라지고 화려한 색으로만 구성되는 화법으로 나아간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 초기 단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좌측하단에는 '시을유원정이당사어가산
서실(時乙酉元正以堂寫於佳山書室)'이라고 쓰여있어 '을유년' 즉 1945년 해방되던 해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1945년에는 서울을 떠나 양평과 안성에 거주하던 시기인데, 이때 양평 군수로 있던 강진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학계에서는 이 작품은 아마도 강진수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려 주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논문도 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이당 김은호도 부산으로 파난을 갔다. 부산에서는 호구책으로 일본에 유학을 함께 갔던 변관식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대한도기'라는 도자기를 만들던 공장에서 접시에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기도 했다. 여기서 많은 화가들이 김은호가 그린 도안을 바탕으로 그림을 접시에 그렸지만 각 작가의 이름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소정 변관식이 그린 접시는 확인이 된다.
한창 이당 김은호의 작품세계가 물이 올랐을 시기의 작품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경매에 낙찰된 작품을 검색했으나 초상화와 초기 채색화 정도가 높으면 1~2천만 원, 낮으면 몇 십만 원에 낙찰된 작품도 있었다. 여기에 작품을 올리는 것이 민망해 사진은 올리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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