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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3편

by !))*!))* 2024. 3. 7.

3편에서는 이당 김은호가 50년대 말부터 197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 제작활동을 알아보려 한다. 이 시기에도 그의 초상화는 여전히 인기가 있어 역사인물의 표준영정을 많이 제작하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또 60년대에 들어서는 이전의 형식과 다른 산수화를 제작, 발표한다.

 

 

 

50년대 말부터 1979년까지 김은호의 활동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시작되면서 왜색을 제거하고 민족 정신을 되살리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결과론적으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현재의 잣대이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조선미술전람회' 형식을 그대로 모방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는 선전이 가지고 있던 여러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는 관전이었기 때문이다. 

 

관전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이고 이 시기만 하더라도 '국전'은 무엇보다 영향력이 큰 공모전이었다. 작가로서 영예는 물론이고, 이 공모전에서 큰 상을 받는다면 일약에  인기 작가가 되어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기에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작가들에게 과욕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전에도 있었지만, 1957년 제6회 국전 심사에 참여하였던 이당 김은호는 서울신문에 <선배의 도의를 찾자>라는 글에서 심사의 파벌과 정실 내막 등을 폭로하며 국전개혁론을 펼쳤다. 이때 변관식도 <공정성을 잃은 심사>, 최우석은 <편파적인 심사>라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였는데 정실에 얽매인 심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당은 이 일로 한동안 국전과 거리를 두다가 1961년 5.16으로 재편성된 국전에서 동양화 분과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나 여전히 이런 문제는 국전에 폐지될 때까지 해결되지는 못했다. 

 

김은호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상화 인기가 높아 주문이 많았고, 이전에 해 두었던 초본(밑그림)을 바탕으로 같은 작품을 지속해서 제작했다. 자세히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승무> 같은 경우 3점 이상이 현재 존재하고 있다. 

 

1966년에 수도여자사범대학교(현재 세종대학교) 명예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중앙일보사 주최 제1회 <현대동양화 10인전>에 출품하였다. 또 같은 해 중앙일보사 주최로 <이당선생 회고전>을 열고 60여 점을 출품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꿩과 모란을 한 화면에 그린 화조도가 인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모란만을 그린 <백모란도>(1968)가 눈에 띈다. 

김은호&#44; 백모란도&#44; 1968
김은호, 백모란도, 비단에 채색, 67.8 &times;52.3cm,&nbsp;1968,&nbsp;가천박물관소장

 

 하얀 목단이 고귀하게 화면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검은 색으로 그린 잎이 꽃 주위를 둘러싼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68년 프랑스에서 열린 <한국 전통회화>전에 출품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김은호가 자신의 전기인 <화단일경>을 집필한 것에 대한 감사 의미로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이었던 고 이구열 미술평론가에게 선물한 것으로 상단에 그 내용이 한학자인 임창순의 글씨로 적혀있다. 

 

이 작품은 고 이구열 소장이 가천박물관에 자신이 평생 모은 근현대미술사 자료와 함께 2015년에 기증했다. 

 

 

 

산수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또 이 시기에, 김은호의 여러 작품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밀한 먹선은 사라지고 채색만 강조된 채색산수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김은호&#44; 풍악추명&#44; 1958
김은호, 풍악추명(楓岳秋明), 비단에 채색, 103&times;205cm, 1958, 한국은행 소장

완벽하게 동양화 제작법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서양화처럼 색채로만 사물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산수화를 개척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물론 동양화에서도 몰골법이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수묵산수화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에 채색을 한다는 것은 광물이나 식물성 재료로 만든 물감으로 채색해서 발색을 내는 것은 여러 번 반복해야 원하는 색을 낼 수 있다. 유화물감과 다르게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따라서 전통적인 북종화처럼 화려하고 섬세한 기교를 사용해서 화조도 같은 것을 제작하는 것에는 적합하지만, 그동안 채색으로만 산수화를 제작하지 않은 이유가  이런 것에 있다. 

 

그러나 김은호는 과감하게 서양화 형식을 차용하여 색이 화려하게 두드러지는 산수화를 50년대 말부터 제작하여 60년대에 금강산 사계를 비롯해 여러 작품을 제작하여 발표하고 있다. 물론 이들 작품이 현장을 사생해서 그대로 옮겨오는 풍경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풍경화와 유사한 형식으로 진전해 나가는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당 김은호 작품의 한계

짧은 글에서 이당의 작품세계에 대한 공과를 언급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간단히 밝히고자 한다. 먼저 김은호는 채색 특히 북종화의 명백을 후대에 전수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도화서가 폐지되고 관청이나 왕족을 위한 미술품 제작의뢰가 사라지면서 이런 형식의 명맥이 사라질 즈음에 우리 동영화단에 이당의 출현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일본화의 영향이나 왜색이라는 시빗거리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이런 부분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분리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당은 젊은 시절 가난함을 떨치기 위해 열심히 화법을 익히고 그것이 좋은 평가를 받아 비교적 이르게 소위 인기 작가가 되었다. 인기 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주문에 의한 제작이 많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현대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는 태도는 그만큼 찾기 어렵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이런 표현은 위험스럽긴 하지만 미술이라는 예술, 흔히 말하는 시대성을 담아낸 작품 혹은 시대를 고민한 작가라고 하기에는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김은호는 근대 시기를 살기는 했지만, 봉건 시대의 마지막 작가라고 표현하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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