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당 백윤문은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당 김은호의 화숙과 지근거리에 살던 백윤문은 그의 문하생이 되어, 후소회 발기인이 될 정도로 화재를 인정받았다. 1927년부터 선전에 출품하여 41년까지 입선과 특선을 하였으나, 42년 기억살실증으로 붓을 놓게 된다. 그는 다시 78년 기억을 되찾아 80년까지 생을 마칠 때까지 다시 붓을 잡았지만, 그의 예술은 피지 못했다.
향당 백윤문의 예술세계는 다 못 피웠다
백윤문의 할아버지인 향석 백희배( (香石 白禧培)는 19세기에 장승업, 홍세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양화가였다. 또 8촌인 임당 백은배 (琳塘 白殷培)는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러니까 향당 백윤문(香塘 白潤文, 1906-1979)은 화가 집안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어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당 김은호가 막 후학을 가르치려는 마음을 먹기 시작한 즈음에, 백윤문은 지근거리에 있던 이당의 화숙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게 된다. 이때 아버지 백필용은 조부 백희배의 호에서 '향'(香), 8촌인 백은배의 '당'(塘)을 따 가통을 잇는 화가가 되라고 '향당'(香塘)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당의 제자가 된 향당은 스승의 지도를 받아 채색화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27년 제6회 선전에 <춘일>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입선을 한다. 이후 연속해서 5회 입선을 하고, 32년에는 <촉규>가 특선을 받는다. 13회, 15회에 특선을 받아 16회에는 무감사 출품을 한다. 18회에는 <건곤일척>으로 특선을 한다.(자료마다 선전에서 특선한 연도와 횟수가 상이하다.)
백윤문은 서화협회 회원으로 작품을 출품하였고, 후소회(後素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김은호의 제자 중에서 여러 방면으로 활약을 했다. 특히 후소회에서는 좌장을 노릇을 했는데 김기창과 장우성보다 나이가 6~7살이나 많고, 김은호 문하에 들어온 시기도 빨랐기 때문이다.
1935년 제14회 선전에 <분노>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특선까지 올랐으나, 작품 내용이 일제의 마음에 들지 않아 입선에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에 일본 경찰에 끌러가 고문을 당해 42년에 갑자기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에 걸려 작품을 더 이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보다 자세한 연구가 있어야 해서 속단하기는 어렵다.
작품 내용은 장기를 두다가 싸움이 난 장면이다. 돗자리 위에 장기판과 흩어진 장기알이 뒹구는 양쪽으로 한복을 입은 남성과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서로 삿대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이는 싸움을 말리려고 하는 장면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흔한 모습이다.
백윤문은 이런 순간의 찰나를 잘 포착하여 화면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속도감이나 긴장감은 다소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장면을 묘사하는 것에는 충분히 그의 능력을 인정할 만하다.
이 작품을 발표 한 이후에도 선전에 1941년 20회까지 선전에 지속해서 출품한 것으로 보아 꼭 이 작품이 발단이 되어 기억살실증에 걸렸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작품이 있다.
* 작품 제목이 <투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림 내용은 바닥을 선을 그어놓고, 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동전을 던지면 이기는 놀이로 보인다. 대개 '투전'(鬪牋)이라고 하는 것은 작은 종이에 끗수를 표시하여 돈을 걸고 하는 노름의 일종을 말한다.
제작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당시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장면을 잘 포착하는 백윤문의 화재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은호에게는 주로 채색을 배웠을 것이나, 이 작품은 '수묵담채' 기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백윤문은 선전에는 인물과 풍속화가 주류이지만, 서화협회나 여타의 곳에서는 전통적인 형식을 따른 수묵화를 제작하고 있다. 아무래도 시장의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서양화와 일본화의 영향으로 반드시 전통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화와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는 수묵화 거기에 채색화까지 스승에 배운 백윤문은 아무래도 당시 사회적인 요청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9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1>에서 절필시대에 백윤문의 작품이 전시되어 많은 이들에게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3
백윤문 작품에서 당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건곤일척>
당시 조선미술전람회는 연속해서 4회 특선을 하거나, 10년 동안 6번 특선을 하면 추천작가가 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선전에 특선 작가가 되면 사회적으로 작가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윤문은 최고상인 창덕궁상, 총독상도 받았으나 위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 특히 1940년 제9회 선전에 낚시하는 사람을 그린 작품 <수조>(垂釣)를 출품했다. 그는 이 작품이 특선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입선에 머물고 만다. 실력으로나 경록으로나 당연히 특선이 뽑힐 줄 알았던 행당 백윤문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백윤문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 아닌지, 월전 장우성은 회고록에 적고 있다.
수조보다 한 해 앞에 선전에 출품한 <건곤일척>은 특선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백윤문의 작품 중에 백미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양화의 영향으로 바닥과 배경을 구분한 것이 무엇보다 화면에 공간을 적절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제각각 움직임을 부여해 시간의 순간을 잘 포착하고 있다. 제목이 승부를 걸고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승부를 겨루는 순간을 일컫는 말인 <건곤일척>이라고 붙인 것만 봐도 얼마나 긴장된 순간인지 깨닫게 한다.
둥근 돗자리 위에 이미 윷 세 개는 떨어져 있고, 나머지 한 개만 공중에 떠 있다. 이것이 떨어지는 방향에 따라 '도'냐 '개'냐를 결정하는 순간이다. 상황을 결정하지 않고 감상자에게 그 상황을 상상하게 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백윤문은 이 작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기억살실증에 걸려던 백윤문은 기적적으로 1978년 자신이 화가였던 기억이 되돌아와 다시 붓을 잡는다. 다시 재기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병으로 붓을 놓았던 그 시절을 회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1편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2편
저평가된 동양화가들 : 북종화 전통을 지키고 이어낸 이당 김은호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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