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새싹 돋는 봄날에 천경자의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가 떠올랐다. 살아온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쓴 자서전 같은 수필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와 같은 제목의 천경자 그림이다. 슬픔과 고독과 회의, 인생의 모든 불행이 가득한 눈을 가진 여인의 초상화이다. 쉰셋 나이에 스물두 살 자신을 들여다보며 슬픈 전설이라고 했던 심정이 어땠을까.
천경자 나이 22살 1946년, 갓난아이 둘이 있는 과부가 되다
천경자(1924~2015)는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 옛날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배우면서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조부'(외할아버지가 모델)로 입선하고, 이듬해에는 '노부'(외할머니)로 입선을 한다.
날로 거세지는 2차 세계대전으로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려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그 앞에 갑자기 등장한 한 남자가 표를 건넨 인연으로 1944년에 결혼해서, 45년에 첫째 이듬해에 둘째를 낳는다. 그리고 8월부터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남편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갓난아이 둘이 있는 과부가 된 것이다. 이 해가 1946년 천경자 나이 22살이던 해이다.
천경자 인생에서 어찌 보면 시련의 시작이었다. 1946년은.
1998년 자신의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으로 다시 떠난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그래서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화관 대신에 뱀을 머리 쓴 여인은 초점 없는 금색 눈동자 그리고 그 가운데 동공은 흰색으로 천경자 특유의 제작법을 보인다. 긴 머리와 긴 목을 받치고 있는 가슴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꼽혀있다. 배경은 별다른 장식이 없이 짙은 청색으로 마루리하고 왼쪽에는 경자, 1977이라고 한자로 사인을 넣었다.
1978년에 출간한 수필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를 쓸 수 있을 만큼 세월이 지나 참담함이 아니라 슬픈 감정으로 승화한 자신의 초상화이다.
그래도 천상 여린 감수성을 가진 예술인가인 천경자는 또 시련을 부른다.
두 번째 만난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그는 1948년 목포 모 신문의 전직 기자였다. 1950년 전쟁통에 여동생마저 결핵으로 잃어버리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여인에게 이 남자는 천경자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모두 어려웠던 시절, 그래도 주변의 도움으로 부산에 내려와 있던 홍익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어 생활하면서 꿋꿋이 버티며 작업을 해 나갔다.
백방으로 약과 돈을 구하려다 결국 동생을 떠나보내고, 자신은 유부남과 연애한다는 세간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1951년 뱀을 그린 생태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한다.
해방 이후 화단은 민족주의 화풍을 되찾는다는 구호 아래,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배척했다. 왜색이니, 호분은 일본화 재료니 하면서 채색화를 그리던 작가를 은근히 멀리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에 채색화 한 부분을 이끌어 오던 이당 김은호마저도 국전에 참여시키지 않던 시기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천경자는 개의치 않고 일본화 기법은 이 시기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생태는 우글거리는 뱀을 그린 작품이다. 맨 위에는 뱀 두 마리가 교미하는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고 가운데는 뱀들이 엉켜있다. 그리고 아래에는 한 마리 뱀이 조용히 있다. 왼쪽에는 한자 이름과 주문인 낙관이 찍혀있다.
이때 만난 두번째 남자와는 7년에 되어서야 관계를 정리하고, 이후부터는 천경자 작품세게의 전성기라고 할 작품이 등장한다. 바로 내 슬픈 전설의 페이지와 수필집 등 70년대 작품이 가장 평론계와 학계에서 호평을 받게 된다. 미술시장에서는 더 화려한 작품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시련을 겪다.
천경자의 나이 67세에 또 시련이 찾아왔다. 그것은 1991년도 미인도 위작 사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었던 천경자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홍보물로 발행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천경자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갔던 천경자는 몇 개월 뒤 다시 돌아와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개인전 열어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위작시비 사건은 작가 절필선언을 불러일으키고, 위작범이 나타나 자백을 하기도 하고, 복잡한 상황으로 진입한다.
시간이 흘러 진정되는 듯하더니 천경자 사후에 다시 논란이 일어나며 또다시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다. 사건은 진품이냐 위작이냐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복잡하다. 더욱이 작가 스스로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모든 증거가 진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상반된다.
여전히 이 사건은 진행 중인 것 같다.
미술작품에서 위작 시비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ㄱ것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작가의 위상은 달라진다. 이탈리아 형이상학파 화가인 데 키리코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위작사건은 일어난다.
불안과 공허라는 우리의 현재 풍경을 닮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2
'국내외 작가와 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중식은 같은 장면인 '백악춘효'를 왜 두 점 그렸을까? 그것도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 2편 (0) | 2024.03.26 |
---|---|
안중식은 같은 장면인 '백악춘효'를 왜 두 점 그렸을까? 그것도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 1편 (1) | 2024.03.25 |
이중섭의 예술인생은 전쟁과 우리의 무지한 문화현상에 지고 말았다 (1) | 2024.03.25 |
병마로 절필한 향당 백윤문, 잊혀진 그의 동양화 작품 다시 읽다 (0) | 2024.03.18 |
조금 늦었지만, 따스한 봄볕이 드는 오지호의 남향집이 생가나는 시절 (0) | 2024.03.16 |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수화 김환기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3) | 2024.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