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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우리 가까이 있는 불안과 공포를 그린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by !))*!))* 2023. 12. 28.

며칠이면 2024년 새해를 맞이한다. 「기생충」에서 열연했던 영화배우의 불행한 선택은 우리에게 새해 설렘보다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새해는 경제와 금리, 기업과 취업 어디 하나 원활하지 않고, 누구나 행복과 희망이 가득할 것이라는 예상보다는 진한 회색의 불안이 피어오른다. 우리 깊은 마음속에 웅크린 불안과 공포를 표현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  에드바르트 뭉크가 떠오른다. 그만큼 우리는 가까이 불안과 공포를 두고 있다.


 

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1863년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14살 때 누나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한다. 후에 어린 여동생이 정신병 진단을, 유일한 남동생도 결혼식 후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도 딸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을 앓다 뭉크가 파리에 체류하던 시절인 1889년에 사망했다. 이런 가족력을 가지고 있던 뭉크는 평생을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 것은 어쩌면 이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술의 전당에서 마침 뭉크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공학 전공으로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대학 도서관에서 미술사를 홀로 공부하면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1888년 지지자들의 후원으로 파리를 방문한 그는 반 고흐와 앙리 드 툴루즈, 폴 고갱의 색채 사용과 단순한 형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어 두 번에 걸쳐 파리에서 작품을 이어가던 그는 1892년 베를린 미술가협회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55점을 전시회를 열었다. 자신의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 야심찬 전시였다.  

 

그러나 전시 시작 1주일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죽음과 성(sex)을 그렸다고 언론과 미술가들의 비난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찬반 투표까지 열었던 베를린 미술가협회는 둘로 나뉘어 결국, 베를린 <분리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 반대급부로 뭉크는 유럽에서 유명화가로 떠올랐다. 그는 '베를린 분리파', '독일예술가연맹',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많은 전시를 하면서 베를린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나는 파리에서 예술을 배웠지만 베를린에서 예술가가 되었다"라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베를린은 뭉크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1889년 베를린에서 그의 대표작이 되는 '인생 프리즈'에 대한 구상을 시작한다. 1894년까지 사랑이라는 주제로 연작을 발표하다가, 1902년 '삶-사랑-질투-광기-공포-죽음'이라는 총 22점으로 구성된 연작을 발표한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이들의 삶의 행로를 더듬는 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에 이미 뭉크는 베를린의 젊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1927년 베를린국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여 뭉크는 베를린뿐만 아니라 북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히틀러 정권 아래서 뭉크의 작품은 퇴폐미술로  낙인찍히면서 83점이 압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08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강당벽화를 제작하고, 1916년 이후에는 거의 오슬로에 머물렀다. 1940년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점령하자, 당시 76세이었던 그는 자신의 유산을 포함한 모든 작품을 오슬로 시에 유증 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한다. 그리고 4년 뒤 1944년에 생을 마감한다. 

 

 

 

우리의 불안과 공포를 그려낸 작품 「절규」 4가지 버전  

뭉크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인상파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지만,  그 이후 자신의 정신세계를 그린 그림으로 베를린을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예전에는 미술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거나 신화를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것이었지만, 표현주의 혹은 상징주의 이후에는 뭉크와 여러 작가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떠도는 것들을 표현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머릿속에 있는 환상을 그려낸 것이기에 뭉크는 또 한 번 미술의 지평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자 인간의 불안을 각인시킨 작품은 「절규」이다. 대충 말하면  불안과 공포는 비슷한 말로 사용하지만 다르다. ‘미래에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을 안고 있다’ 거나 ‘지진과 핵에 대한 공포’ 이런 일상적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안은 대상이 막연하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꼭 집어서 무엇이 나를 떨게 하는지를 말할 수 없을 때 불안이라는 말을 쓴다. 공포는 확실한 대상, 예를 들면 어떤 현상이나 특정한 동물로부터 느끼는 무서움이다. 물론 의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도 더 면밀히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미 우리 일상에서 불안과 공포를 은연중에 나누어 쓰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절규는 모두 4점이 있다. (판화를 더하면 5점)

뭉크의 절규 작품 판본
1) 1893 파스텔 35.2&times;25.1cm, 뭉크미술관 소장 2) 1893 판지에 유화, 템페라, 파스텔, 크레용, 73.5&times;91cm, 오슬로국립미술관 소장 3) 1895 석판화(리도그래프), 뭉크미술관 소장 4) 1895 59&times;79cm 파스텔 개인소장 5) 1910 유화, 83.5&times;66cm, 템페라, 뭉크미술관 소장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 질 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글)

 

위 그림에서 1)은 1893년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시각화하려는 작업에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본격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이전에 그린 드로잉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파스텔로 빠르게 작은 종이에 그렸다. 2)가 본격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크기도 73.5×91cm나 된다. 두꺼운 종이에 유화와 템페라, 파스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판지(하드 보드)에 그렸다. 대부분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은 강하게 색을 보정하여 강한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3)은 1895년 석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흔히 판화는 여러 장 찍어낼 수 있는 기법이라고 알지만 한 장만 찍어내는 기법도 있다. 이 작품에서 사용한 석판화(리도그래프)는 한 장만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절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
뭉크, 절규, 1893, 오슬로구립미술관 소장

 

Edvard Munch, The Scream – Nasjonalmuseet – Collection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www.nasjonalmuseet.no

4)는 오로지 종이에 파스텔로 그린 작품으로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한 작품이다. 2010년 5월 소더비 경매에서 약 1억 2천만 달러에 낙찰된 작품으로 2010년까지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이다. 또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작품을 둘러싼 넓은 액자에 1892년에 썼던 글(위에 글 참고)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파스텔로만 그려서인지 색은 다른 작품보다 약간 더 화려한 느낌도 있다. 

2010년 경매에 나왔던 절규
2010년 소더비 경매에 출품했떤 뭉크의 절규 중에서 파스텔화이다.

5)는 2) 그림처럼 유화와 파스텔 등 열 재료를 사용하여 재작한 작품이다. 뭉크는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작품 제작에 있어서는 철저한 계획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절규」 작품에서 여러 재료로 사용한 것, 기법도 다르게 한 것 등을 보면 그랬을 것이다. 이 작품도 도난을 당한 경험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다. 문화재아 미술작품에 대한 테러와 도난은 불가분의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비싼 것인지 비싸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경북궁 낙서 사건에서 보는 예술에 관한 일반적 의식

경복궁 낙서 테러 모방범은 자수했고, 최초 낙서 테러범은 누군가 돈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두 차례에 나누어 10만 원을 받고 이번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몇 년 전 방송에서 커다란 불길이 휩싸

red-pig-11.tistory.com

1893~1910년까지 그린 뭉크의 ‘절규’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에 대한 기록이다. 뭉크 스스로도 이런 주제로 50가지가 넘는 변형된 작품을 제작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주제이다. 그의 전 생애에 관통하는 주제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가슴속 불안과 공포를 견디어내야 한다.  

우리 사회 모두가 막연한 불안과 자신의 생활에 대한 공포를 심각하게 느낀다. 크기나 강도나 뭐 이런 차이는 있겠지만 속세를 떠나지 않는 이상 불안은 없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불안이 우리의 삶을 이어야 할 동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아니, 한 치 앞도 전망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경제 속에도 우리는 굳건히 견디어 냈다.

 

지금을 견디어 내면 분명히 한 시간 뒤, 내일 아침은 해가 밝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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