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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잊혀진 겨울풍경을 유천 김화경의 동양화로 다시 추억하다.

by !))*!))* 2023. 11. 20.

 

 

우리에게 추억과 상상으로 남은 겨울 풍경을 그린 유천 김화경의 '설경'이 생각나는 시절이다. 초가집 기와집 몇 채 있는 작은 마을에 눈이 내리는 풍경은 이제 그림으로만 남았다. 첩첩산중을 다 뒤져도 눈 속에 묻힌 초가집은 없고 펄펄 내리는 함박눈도 마주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살기는 편해졌지만 대신 우리 마음속 있던 아름다운 정감을 그 대가로 치렀다. 

 

유천 김화경이 그린 설경으로 제작년도는 미상이다
김화경, 설경, 한지에 수묵채색, 66.5×93㎝, 연도미상, 아라리오 컬렉션

동양화가 유천 김화경의  예술세계 변화에 대한 단상

충청도 아산에서 태어난 유천 김화경(柳泉 金華慶, 1922~1979)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여 조선미술원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러다 1930년 중엽에 장안에서 가장 유명한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의 화숙(화실의 일본식 표현)에 들어가 스승의 화풍대로 채색화를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몇 번 출품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으로 건너가 1942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하여 1944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천안 등지에서 미술교사를 하였다.

 

해방 이후 천안 등지에서 미술교사로 지내며 이당의 화풍으로 작품 창작을 병행하였다. 1960년 경에 서울로  올라와 57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도여자사법대학교(현 세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60년대부터 그의 화풍은 수묵문인화법과 채색기법을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창설되고 미술계는 일재의 문화잔재를 청산하고 민족미술을 건설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에 동양화는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김용준과 월전 장우성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전통과 문인화를 살리는 것이 민족미술을 세우는 것으로 확인했다. 따라서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긴 채색화는 세력을 잃고 수묵산수화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1961년 5.16 등 크나큰 사회격변을 겪었고 이와 함께 외국 미술정보가 속속 유입하면서 우리의 미술계도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이 시기 평론가들은 동양화의 변화한 모습을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다. 하나 동양화의 양식을 존속시키는 범위 내에서 자연적인 주제를 지속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전통적 양식을 탈피하여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묘법과 재료를 독립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60년대부터 수묵화 기법과 채색 기법을 혼용하는 방법으로 유천 김화경의 작품제작이 변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연구와 창작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이 그의 생을 일찍 마감한 것이 안타깝다. 

 

 

 

유천 김화경의 대표작인  천산비설도

천산비설도( 天散飛雪圖, 한지에 수묵채색, 120×120cm, 1971, 아라리오미술관 소장)는 비교적 큰 작품으로 위쪽에 화제가 쓰여있다. 유천의 작품에는 화제가 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이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는 스승인 이당이 유천은 글씨가 아름답지 않으니 호만 크게 쓰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한문을 잘 모르는 이가 보아도 썩 잘쓴 글씨라고는 못할 것 같다.

유천 김화경이 1971년에 그린 천산비설도이다
유천 김화경, 천산비설도, 1971

하지만 '하늘에 흩날리는 눈'이라는 제목과 붓글씨는 이 작품에서는 꽤나 잘 어울린다. 하늘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눈이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화제 아래에는 크고 작은 초가집 몇 채가 눈을 맞으며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어스름한 저녁인지 농부가 앞마당에 나와 거름을 삽으로 퍼담고 있다. 큰 장군을 실은 수레는 곧 어디로 가려는지 무거운 바퀴가 눈에 파묻혀있다. 

 

농부 옆에는 검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세우고 곁을 지킨다. 이 추운 겨울에도 농부는 강아지가 있어 덜 외로워 보인다. 마을 뒤편에는 눈으로 덮인 산과 나무가 있어 그나마 마을을 강풍으로부터 감싸고 있다. 여기까지가 천사비설도를 구성하고 있는 화면이다. 조형적으로는 특별하다거나 눈에 띌 만한 것은 없다.

 

다만 이 작품도 여타의 설경을 그린 작품처럼 눈은 호분으로 그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호분이란 풍화된 대합이나 굴껍데기를 빻아서 만든 것으로 합분 혹은 패분이라고 부르는 동양화 재료이다. 곱게 갈아서 만든 호분과 아교를 섞어서 만든 안료를 붓으로 찍어 흰 눈을 표현하였다. 흰색을 표현하는데 이만한 재료는 없다. 그런 호분이 일본화에서 많이 쓰이던 재료였고 따라서 채색화에 많이 쓰일 수밖에 없던 안료였다. 이것을 해방 이후 60년대 말까지 왜색이라고 천대하여 호분 사용을 자제하던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유천은 이를 수용하고 자신만의 작품제작에 잘 활용하여 한국의 겨울풍경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축한 공은 높이 살만하다. 이것 때문에 유천은 수묵산수화 기법과 채색 기법을 혼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잊힌 풍경이고 추억의 풍경이다. 누군가에게는 상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림으로만 남은 한국의 정경운 겨울 풍경이 되었다. 첩첩산중이라고 해도 이제는 초가집도 이렇게 내리는 눈도 거의 볼 수 없다.

이 겨울에는 초가집은 몰라도 이렇게 내리는 눈이라도 보며 추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화제 : 천산비설도에 쓰인 화제를 간단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옛날 학식이 잎은 인사들이 붓을 들어 산수를 그리며 스스로 즐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설경을 그리는 이들은 속세를 떠난 자신의 고고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왕마힐의 설계도(중략)는 유명하여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 회자되고 있다.

 

나는 다행스럽게 이 모두를 볼 수 있었다. 매번 이를 모방하여 그리고 싶었는데 스스로 부족하여 붓을 댈 수가 없었다. 내가 우연히 우리 마을과 옛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촌락 사이를 그리던 중에 눈이 몇 척이나 내려 산봉우리들이 푸른빛을 잃고 나무들이 넘어졌다. 

 

눈을 밟으며 좋은 종이를 꺼내 도상을 탐구한 다음 흥이 나서 붓을 적시고 산에 쌓인 눈을 그렸다. 일시에 실마리를 풀어낼 수 없어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다만 붓 쓰는 것이 졸렬하여 옛 사람의 만분의 일도 따라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심정을 담은 정결한 뜻은 마땅히 스스로 덜어지지 않는다.

 

신해년(1971) 10월 상순 류천이 그림을 그리고 청사 안광석이 제목을 달고 옛글을 모아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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