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과 사회

1900년 파리박람회에서 치욕이라는 모욕을 들은 인상파와 모네

by !))*!))* 2023. 11. 6.

서양미술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그림은 아마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일 것이다. 감상하기 쉽고 어려운 주제도 없기에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상파가 등장한 초기에는 온갖 악평에 시달리면 갖은 모욕을 받았던 것이 인상파 작가들과 작품이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가장 인기 있고 비싼 작품이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치욕입니다.
대통령님! 멈추십시오. 이것은 프랑스치욕입니다! 

 

 

 

1900년 파리박람회에 <프랑스 미술 100년 전>에 등장한 프랑스 치욕

프랑스의 20세기의 새로운 문은 '샹 드 마르스' 공원 일대에서 개최된 파리박람회에서 열렸다. 약 200일 동안 5천만 명 관람객이 손에 작은 사진 상자를 들고 구경을 한 세기의 이벤트였다. '프티 팔레'에는 '기원부터 1800년까지'를 보여주는 프랑스 자랑인 5천 점이나 되는 작품이 전시되었고, '그랑 팔레'에서는 <프랑스 미술 100년 전>이라고 붙인 당시의 시계로 따지면 현대미술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이렇게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자리에 물감을 캔버스에 부었다느니, 어린아이의 유치한 장난이라느니, 갖가지 비난을 받는 인상파 작품이 걸렸다. 그것도 그랑 팔레 마지막 벽면에 가장 최신 사조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고갱 등 몇몇 작가가 빠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인상파 작가의 작품이 프랑스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만국박람회를 찾은 관람객을 맞이하는 영광을 갖게 된 것이다. 

 

갖은 모욕에도 불구하고 인상파의 인기는 높아가고 있었고,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난 작가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인상파 작가들도 경제적 안정과 부를 누리기 시작했던 때였다. 그런데도 당시 최고 권위를 가지고 프랑스 아카데미를 이끌던 신고전주의 화파이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작품으로 유명한 장레옹 제롬(Jean-Leon Gorme, 1824~1904)이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Emile Loubet) 앞을 감히 가로막았다. 두 팔을 벌리고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프랑스 치욕이라고 목소리를 대통령 앞에서 내뱉은 것이다.

 

이때가 인상파가 등장하고 30여 년이나 지난 시기였지만,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들은 인상파를 인정하기 싫어했고 프랑스 미술의 불명예라고 여겼다. 예나 지금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그림에 대한 편견은 언제나 있었다. 그 편견은 시간에 따라 점점 사라지기도 혹은 변하기도 한다. 편견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아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미술작품에 대한 편견과 창조적 특징 - 4 - 세상을 잘 살기

정규교육을 철저히 특히 열심히 받은 사람일수록, 정확하게 말하면 우수한 성적으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사회에서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일수록 이런 편견을 크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angelkart.co.kr

 

 

 

인상파라는 이름조차 조롱이있던 인상파 등장과 모네 

인상파라는 말을 생성해 낸 계기를 만든 이는 바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이다. 파리 식료품상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16살부터 그리에 눈을 떴고, 르누아르, 시슬레, 바질 등의 작가들과 사귀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대부분 작가가 그랬듯이 인상파 작가들도 예술가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프랑스 살롱전이라는 관전에 출품하였지만, 번번이 낙선하고 말았다. 

 

기성작가들 눈에는 이들의 그림은 수준 이하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한 젊은 작가들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를 중심으로 뭉쳐서 1863년 낙선자 전람회(Salon des Refuses) 열고 새로운 그림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하면서 일단의 젊은 그룹이 탄생된다. 

 

이들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해산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와 1874년 <화가, 조각각, 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개최하였다. 여기에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라는 풍경화가 있었다. 이 작품을 본 신문기자가 본질보다는 인상만을 그렸다는 의미로 조롱이 섞인 기사를 쓴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계기가 되었다.    

 

모네가 1872년에 그린 인상 해돋이 작품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인상파 작가들도 선선히 이 조롱을 받아들였다. 모네가 이 작품에 인상이라는 말을 붙인 것도 재미있다. 전시회 카탈로그를 작성하던 사람이 모네가 붙인 제목이 너무 단조롭다고 투덜거려다. 그러자 모네는 조용히 "그럼 제목 앞에 인상이라고 붙이면 되겠네"라고 하면서, 작품 제목이 '인상 해돋이'가 되었고 이것이 인상파가 된 것이다. 조롱 섞인 이름으로 비록 정식 명칭을 얻기는 했지만, 그들은 앞으로도 20여 년을 더 힘든 생활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몰랐으리라.

 

모네의 작품세계

모네는 인상파의 가장 연장자였고 멘토였던 마네의 뜻을 좇아 그림 도구를 들고 화실 밖으로 나갔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보지 않고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자연의 변화를 순간적으로 관찰하고 포착하기 위해서 붓은 재빨리 놀려야 했다. 그래서 모네는 그림을 빨리 그렸다.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화면에 원색 그대로 옮겨 거칠고 강한 붓 터치로 그렸다. 세부보다는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 빛의 효과에 주의를 기울였다. 

 

모네의 작품은 마치 자연 속에서 바람을 맞고 햇빛을 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한 장소에서 같은 소재를 시간대 별로 그림을 그렸던 모네는 아침, 점심, 저녁 시간에 따라 다른 자연의 빛을 포착하려 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루앙 대성당> 작품 시리즈이다.

 

모네는 1893년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찾자, 파리 근교인 지베르니에 집과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습지를 구입해하여 강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모네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을 정도로 자신의 마지막 예술의 혼을 불태웠다. 때로는 수련 정원을  자랑하고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수련이 필 때면 지인들을 불러 파티를 열기도 했다. 

 

평생 인상파 그림만을 고집한 모네는 1926년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마지막 자랑거리였던 <수련> 전시회는 보지 못하고 자연의 빛으로 사라졌다. 모네의 꿈이었고 자부심이며, 마지막 자랑거리였던 <수련> 작품은 1927년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