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은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간송은 부친이 물려준 많은 재산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린 문화재를 모으고, 지키는데 평생을 바쳤다.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짓고,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민족정신을 이어갈 교육현장을 지켜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수많은 서적과 서화, 석조물과 자기를 수집하여 국보로 지정된 것만 수 십 점에 이른다. 최근 경복궁 낙서 테러와 함께 간송의 문화에 대한 사랑을 알아보기로 한다.
간송의 청년시절 이야기
꼬맹아! 여기 좀 앉았다가 가자. 그림 보라고 데려왔더니, 딴짓만 하고...
아빠! 저기 사자는 뭐야?
문 앞에 있는 저거, 나쁜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지키는 사자야, 무섭게 생겼지.
오늘 아침에 니가 칫솔질 안 하고, 세수하기 싫어했다고 저 사자한테 혼내달라고 이를까?
아니야, 했어. 깨끗이 했어!
그래! 멋있게 생겼는데 앞으로는 잘할 거지!
여기는 ‘간송 전형필’이라는 분이 만든 간송 미술관이야!
그 사람이 누군데, 뭐 하러 이걸 만들었어?
간송, 예쁜 책을 모으는 아이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어. 그때는 우리나라가 아주 힘들었어.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를 자기들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런 때에 배우개(지금 종로 4가)에서 ‘전영기’라는 분의 막내로 태어났어. 형 하고는 14살 차이가 났고, 대문만 따로 내서 사는 작은할아버지 집에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지.
간송은 태어나자마자,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작은할아버지 집에 양자로 갔어. 그렇긴 해도 바로 옆집이어서 방을 옮기거나 한 것이 아니라서, 대가족이 모여 사는 배우개 집에는 웃음이 넘쳐났지. 하지만 간송의 열 번째 생일 하루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어. 또 일 년 뒤에는 작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다음 해는 작은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지. 나이가 많으셔서 돌아가시긴 했지만, 연거푸 웃어른들이 돌아가시자 배우개에서 가장 큰 집에는 슬픔이 깃들었지.
두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며 하며 자랐어도 이제 막 10살이 된 간송은 의젓하게 자신의 슬픔을 감당해야만 했지. 더 큰 슬픔은 몇 년 뒤에 찾아왔어. 유일한 친형이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지. 그 해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었고, 간송은 ‘어의동공립보통학교’ 3학년이었지. 어린 나이에 두 집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어. 그래도 잘난 척하거나 사치하지 않고 언제나 행동거지를 올바로 하려고 했어.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책과 필기구는 항상 아껴 썼고, 쓰고 난 뒤에도 깨끗하게 정리하곤 했지.
‘어의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올라가 성숙해진 간송은 언제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소년이었지. 운동도 좋아해서 축구와 야구를 열심히 했지. 성격도 신중해서 허튼 말도 별로 없고, 특히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새로 나온 책이거나, 옛날 책이거나 구분하지 않고 읽곤 했어.
책 내용이 별 관심이 없는 것이라도, 예쁘게 꾸며진 책이거나 특이하게 만든 책을 보면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지. 그래서 항상 옆구리에 책을 끼고 들어오는 간송을 부모님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격려하고 칭찬했었다고 해. 왜냐하면 책 모으기 좋아하고, 읽기 좋아하는 것은 생각을 깊게 하는 일이니까 말이야.
꼬맹이는 책 읽는 것 좋아하니? 내가 보기에는 매일 텔레비전만 보는 것 같던데.
아니야! 나 책 좋아해. 엄마가 책 많이 사주었어.
그래, 책을 읽어야 생각도 깊어지고, 세상 일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많이 읽을 거지.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딴 소리는, 궁금하니? 잠깐만, 물 좀 먹고.
일본 와세다에 유학을 가다.
휘문고보 5학년이 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마음을 굳혔지. 일본을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려고 말이야. 1926년 마침내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 합격해서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갔지. 물론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학 왔다고 하면, 은근히 멸시하는 일본학생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열심을 내었지.
유학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을 간송이 후에 ‘수서만록’(蒐書漫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는데,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대학 근처에 있는 옛날 책을 파는 서점에 들르곤 했대.
간송은 큰 집안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유일한 상속자였지만, 그의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침착했어. 소리 없이 어려운 친구를 도와주기도 했지. 어렸을 때부터 계속된 집안의 슬픔을 겪었고 우리나라도 일본이 강제로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에는 항상 자신의 미래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속 깊은 학생이었지.
앞으로 할 일을 결심하다.
어느 해 늦은 봄날이었는데, 수집한 책 목록을 써넣을 수 있는 좋은 책을 발견하고 좋아라 보고 있었대. 책도 잘 매어져 있었고, 내용도 간단하면서 요령 있게 기록할 수 있게 된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자네 그 목록을 가득 채울 자신 있나?” 하고 말을 걸더래.
돌아보니 같이 공부하는 일본 학생이었는데, 왜 이런 말을 할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노력하면 이런 목록 몇 권은 채울 수 있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대.
아마 그 학생은 간송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몰랐겠지. 그리고 은근히 조선을 얕보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간송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것이지.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멸시와 수모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지. 하지만 겸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간송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지. 방학 때면 일본에서 돌아와 ‘어떻게 하면 이 불행한 우리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뜻있는 선배와 친지 그리고 선생님을 찾아다녔지. 특히 휘문고보 시절 미술을 가르치던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 선생님을 자주 만나, 자기 생각을 의논하곤 했지.
고희동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본 ‘동경대학’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왔지만,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이해하고는 다시 동양화를 그린 분이야. 그런 분이 간송에게 암울한 우리나라에 희망을 갖게 되는 일은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알려주었지.
암흑한 수난에 맞닥트릴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지키는 일이라고 깨달은 것이지. 지금도 그래야 하는 데 이상한 사람들이 문화재에 낙서를 해서 나쁜 일을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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