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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립미술관박물관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범위-국립현대미술관 과천

by !))*!))* 2023. 11. 28.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서 국립기관이며, 한국 미술문화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특히 역사 부분에서 용어 정의와 기록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보통은 국립기관의 기록을 믿고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대한 정의와 범위를 보다 정교하게 제시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기학적 추상미술의 정의와 적용범위

잡지  데 스틸(De Stijl, 1917~1932)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게 반 되스부르크(Theo vanesburg, 1883~1931)가 제안하여 1917년 잡지 데 스틸(De Stijl, 1917~1925)을 창간했다. 여기에 건축가, 조각가, 영화감독 등이 합세하여 그룹운동을 결성했다. 이들은 현실로부터 비극적인 것, 개인적인 것으로 결별하기 위해 객관적인 조형언어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자연에서 발생한 불순물과 우발적인 무질서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수직선과 수평선, 빨간색, 파란색, 노랜 색 삼원색과 흰색 검은색, 회색 이렇게 8가지 요소만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경향의 미술을 요소주의(Elementalism)라고 부른다.(자신들의 결정에 따라 다른 요소를 더 추가할 수도 있겠다.)

 

1924년 반 되스브르크가 수평선과 수직선에 더해 조형의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각선 사용을 주장하였으나 완고했던 몬드리안은 반대한다. 이 사건으로 결국 데 스틸은 동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각선 하나 더 추가하자고 했는데 그걸 반대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요소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정밀하게 자신들의 철학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만큼이나 그것을 지키고자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1912)이라는 글에서  추상미술은 '요소주의'와 '자유 추상'이라는 두 방향으로 구분된다라고 분명하게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추상미술의 발생과 전개에 대하여는 많은 주장과 주의를 폭넓게 검토해야 하는 복잡한 사항임은 분명할 것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3. 11. 16 ~ 2024. 5. 29) 도록과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관한 정의와 범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볼 차례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관장 인사말에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처음 등장한 근대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중략) 이번에서는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라고 불렸던 1960~1970년대까지 전시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도록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도록

 

그리고 학예사의 전시 글에서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기하학적인 형태,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한 경향이다. 중략) 국내에서도 기하학적 추상은 1920~30년대에 처음 등장해 한국 미술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존재해 왔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는 기하학적  추상의 시기로 불릴 만큼 이러한 경향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시장 첫 순서에 김환기 <론도>(1938, 캔버스에 유채, 61×71.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를 제시한다. 도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네이버의 여러 지식백과에서도 김환기의 <론도>는 기하학적 추상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론도가 왜 기하학적 추상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도록과 리플릿 어디에도 김환기를 비롯한 작가 설명은 없다. 다만 전시장에만 캡션 형태를 간단히 설명문이 붙어있을 뿐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라는 김환기 <론도>

데 스틸이 주장에 따르면 '론도'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벗어난다. 

 

론도에서는 수직, 수평선보다는 자유 추상화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선이 더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 스틸이 주장했던 비극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 자연의 불순물과 우발적인 무질서하게 자연을 재현하는 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론도라는 작품 이름은 김환기가 직접 붙였을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될  무렵에 이미 일본 신문이나 여러 글에서 이 작품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론도'라는 춤곡에 붙이는 용어를 자신의 작품에 붙인 이유를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론도' 곡을 들었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이 론도를 들으며 춤추는 장면 즉 자연 풍경(널은 의미로 본다면, 인간의 생활 모습도 풍경으로 파악한다면 여기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을 단순하게 구성한 작품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음악의 리듬 혹은 율동감을 훌륭히 시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야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소주의를 혹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제작한 작품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덧 붙이면, 1933년에 일본에 건너가 바로 추상화를 연구했다고 하더라도 서양화라는 매체를 접하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이런 정도로 캔버스 화면(론도는 1938년에 제작되었다.)을 구성할 수 있었던 김환기의 화재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게재된 논문에서도 론도를 기하학적 추상미술로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

김환기에 관한 많은 논문을 모두 검토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김환기가 일본 유학에서 관심을 가졌던 분야와 추구했던 것에 관해서 자세하게 규명하고 있었다. 김환기와 교류했던 인사들과 그룹 그리고 사사했던 선생들의 이력을 파악하건대 기학적 추상미술, 요소주의 추상보다는 입체파와 미래파 혹은 초현실주의에 경도된 이들이 더 많았다.   

 

참고한 논문은 아래와 같다. 

  • 문정희, 김환기의 <종달새 노래할 때>(1935)에서 <항아리와 여인들>(1951)까지, 미술사논단, 2012, vol., no.34, pp. 243~266, 한국미술연구소
  • 김혜신, 화가의 탄생 : 1930년대 일본의 김환기, 미술사논단, 2018. 06., pp. 125~138, 한국미술연구소

더욱이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도록에 게재된 네 편의 논문에서도 김환기의 론도 작품을 기하학적 추상미술로 재단한 것은 없었다. 

  • 서유리, 한국 근대의 기하학적 추상 디자인과 추상미술 담론: 1920~30년대의 잡지 표지 디자인을 중심으로
  • 강은아, 신조형파의 기하학적 추상
  • 권영진, 1960년대 말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위에서 환원으로
  • 조수진, 시대양식으로서의 한국 기하학적 추상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전으로 했던 전시 중에 추상미술 역사와 관련된 전시가 있었다. 덕수궁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었던 시절인 1978년에 개최된 전시였다.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11.03~11.12)은 제목으로 된 전시는 4부 나누어 기획된 것으로 대규모 전시였음은 물론이고, 추상미술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직접 창작에 임했던 이들이 참여한 전시였다. 

  • 1부 뜨거운 추상 운동의 태동과 그 전개(1957~1965)
  • 2부 차가운 추상의 대두와 회화 이후의 실험(1966~1970)
  • 3부 개념예술이 태동과 예술개념의 정립(1969~1975)
  • 4 부 탈이미지와 평면이 회화화(1970~1977) 

이번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에서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추상미술에 대해서는 1978년에 있었던 전시에서는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본격적인 추상미술로 재단하지 않았던 것인지 더 조사,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생존해 있었을 것이므로, 당시에 당사로서  이 작가들의 생각과 철학은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론도라는 작품을 기하학적 추상미술로 파악하려 했다면 보다 정밀한 연구와 논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학계에 있는 이들과 자문과 인터뷰를 통해 사실을 혹은 정황을 더 파악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판단은 기록으로 영구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에 관한 유감

잡지 표지 그리고 건축 부분에서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포괄적으로 한국의 추상미술 역사를 다시 부각하려는 의도였다면 미술의 다른 장르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조각이나 동양화에서도 분명히 이런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공예에서는 이런 노력과 흔적이 없었는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들 장르에서 나타난 추상의 영향과 여기서 밝히고자 한 추상의 경향이 다르기에 제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동양화의 추상 운동에서는 여기서 언급한 4부 기하학적 추상의 시대와 4-1부 청년미술로서의 기하학적 추상에 얼마든지 편입될 수 있었을 것이 리거 생각한다. 이 부분도 전시를 기획한 이들의 의도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분명히 아쉬움 점은 있다. 만약 이렇게 조각과 동양화도 함께 전시되었다면 이 기획전은 보다 풍부한 감상거리를 미술애호가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설치된 캡션

 한 가지 더 언급하면 조명에 관한 부분이다. 조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전시장에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작품에 조명이 골고루 닿지 않아서, 작품 귀퉁이가 어두운 것들이 많았다. 적어도 이런 상황은 세심하게 신경 써서 배제해야 하는 일이다. 큐레이팅의 가장 기본 중에서 기본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캡션에만 크기에 따라 정확하게 조명을 비추게 조명기구를 사용했다. 이 조명기구는 작품에 비추지 못할 사정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튼 작품 조명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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