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에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동양화 기증작품 전시이다. 2000년대 들어서서 동양화는 주목받지 못하는 장르가 되었지만, 우리나라 1세대 화랑인 동산방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수집했다. 그것은 한 화상의 집념이었고, 그 결과로 우리는 동양화라는 미술 역사를 잊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의미 있는 전시를 잊지 않기 위해 눈에 띄는 3 작품을 소개한다.
동녘에 거닐다: 국립현대술관 특별전에서 느끼는 기증이라는 의미
미술시장, 갤러리 혹은 화랑이 거의 없었던 시절인 1961년에 동산방은 표구사로 출발했다. 1990년대 우리나라 미술시장을 대표하는 인사동에 동산방은 1974년부터 현재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다. 이번 기증전은 동산방 설립자 박주환이 컬렉션 하고,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 박우홍이 동양화 154점을 비롯해 200점이 넘는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기념으로 열린 특별전이다.
미술작품을 수집하고 기증하는 일에 대하여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우리 사회에는 남아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유명 경매사에서 고흐나 피카소와 같은 작가의 작품이 고가에 낙찰되는 경우 언론에서 사용하는 수식어가 바로 그것이다. 수식어 속에는 '이런 것에 이렇게 큰 금액으로 누가 사는 거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혹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은 느낌이 들어있다. 곰곰이 수식어를 생각하면 그렇게 다가온다.
그나마 누구나 알만한 작가라면 부정적 수식어는 줄어들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 고가로 낙찰된 소식을 전할 땐 여지없이 그 부정적인 수식어가 등장한다. 그 작가의 작품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 평가할 정도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수집가들이 어떤 조사도 없이 경매에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이런 수집 행위가 없다면 박물관, 미술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구나, 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에 하나는 예술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는 일이고, 후세에게 전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수집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두 남겨두고 가는 일이다. 아무리 귀하고 비싼 물건이라도 저 세상에 들고 갈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미술시장에서 외면받고, 수집가에게도 외면받는 동양화를 동산 박주환이라는 화상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의 동양화 역사는 형편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관심 없는 일과 물건은 결국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특별전은 큰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도 불구하고 동녘에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은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제목만 특별하고 전시구성이나 진열, 조명, 동선 심지어 캡션조차 제대로 하려고 한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전시장 벽에 '이번 전시는 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앞 선 전시의 구성물을 80% 활용한 전시'라고 쓰인 문구는 서글펐다.(대략 이렇게 쓰여 있었다.)
채색화 전통을 지킬 수 있게 한 이당 김은호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는 인천에서 태어나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인 인천관립일어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이 파산하여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1908년 기술학교에 입학하여 측량을 배웠다. 측량기술 중에 제도(제도)에 흥미를 느껴 그림 위에 종이를 대고 베껴 그리는 모사와 도안을 배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1909년 부친이 사망하고 집안의 가장으로 생업에 종사하던 김은호는 당시 중구원 참의였던 김교성(1860~1943)에게 필사 솜씨로 눈에 띄게 된다. 김교성은 서화미술회 화사인 심전 안중식에게 편지로 김은호를 소개한다. 서화미술회에 1912년 이미 입학한 이상범, 최제우 등 동급생보다 늦게 합류하여 그림을 배우게 된다. 서회미술회에서는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에게 북종화법(채색화법)과 남종화법(수묵화법) 그리고 서(書)를 익힌다.
1915년 송병준의 책 <영적가>에 넣을 순종의 '대원수군복반신상'을 엽서크기로 모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안에 김은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이후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와 고려미술원 등의 활동과 장안 최고의 초상화가로 그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다. 이런 인기로 동양화단의 영향력이 커지자 주변 동료의 시기도 받고, 일제로부터 갖가지 회유를 받기도 했다. 1930년대에 개인화실인 '낙청헌'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제자들 모임인 '후소회'를 지지하며 제자의 활동을 격려하기도 했다.
<매화>, 비단에 채색, 8폭 병풍, 1939
1939년에 그린 이 작품은 40대인 이당 김은호의 필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일 것이다. 설명글에는 '두 그루의 매화가 커다란 화면 전체에 펼쳐져 있는(중략) 병풍그림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읽고 왜 두 그루인지 한참을 보았지만, 한 그루로 보였다. 홍매와 백매 두 가지가 그려져 있어 두 그루 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한 그루로 보였다.
사군자에 하나인 매화를 붉은 꽃과 흰꽃을 동시에 그린 것은 이해되지만 왜 나무는 한 그루로 그렸는지 알쏭달쏭한 것이 재미있어 보였다. 8폭 병풍에 한 가지 주제로 화면을 채운 것으로 이당의 화면 운용능력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자칫 지루하게 보일지 몰라 참새 몇 마리를 그려 넣은 것도 이당의 탁월한 화제 능력이다.
북종화법은 흔히 채색화법을 지칭한다. 간단하게는 비단이나 벽에 채색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력을 들여야 하고 물감도 많이 필요했다. 광물이나 식물에서 얻은 물감은 매우 비싸기도 했고 한두 번 발라서는 발색이 어려우므로 여러 번 칠해야 했다. 따라서 채색화는 비싼 그림이었기에 공적으로 의뢰받거나 부유한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한말 겨우 이런 장르가 이어오고 있었고, 이당 김은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채색화법은 일제의 잔재로 치부되면서 동양화 부분에서 오랫동안 왜색으로 터부시되었다. 이런 의식은 꽤나 강력하고 오래되어 산수화 혹은 수묵화만이 우리의 전통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당 김은호는 1930년대 말부터 해방 때까지 했던 행적으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고 기록되어 친일작가로 언급되고 있으나, 그가 우리의 동양화단에 끼친 커다란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춘전 이용우의 1930년대? 작품
춘전 이용우(春田 李用雨, 1902~1953)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이에 부친의 도움으로 1911년 서화미술회 1기생으로 입학한다. 입학 동기로 오일영과 이한복이 있었고 1914년 첫 졸업생이 된다. 스승 안중식에게 춘전이라는 호를 받았으나 1926년 무렵부터 묵로(墨鷺)로 바꾸었다.
불이 난 창덕궁 대조전을 새로 짓고 여기에 벽화 제작을 오일영과 함께 1920년에 의뢰받았다. 여기에는 당대 가장 유명했던 김규진과 이도영이 참여하였고, 이들과 함께 김은호도 제작 의뢰를 받았다. 이때 이용우가 그린 <봉황도>는 장식적인 궁중화로 채색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지만 그의 재주가 뛰어났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1920년부터 서양화풍과 전통적인 화법을 융합시킨 화풍으로 산수화를 많이 그렸으며, 1923년 서화미술회 졸업생으로 구성된 <동연사>에 참가하게 된다. 동연사는 우리나라 최초 동양화 동인회로 노수현, 변관식, 이상범 그리고 이용우가 참가했지만, 재정난으로 이내 해체되고 말았다.
이 시기 이용우의 작품 경향은 관념적인 산수화풍을 벗어나 새로운 시점을 적용하려 하거나 실경(實景) 산수화를 그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산수>, 비단에 먹, 1930년대
이용우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시골풍경>으로 1940년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52년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작품은 재료만 보다면 동양화이지만 기법이나 구도는 서양화법을 따르고 있다. 또 실경에 가까운 그림이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이용우의 연구가 아직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1930년대라고 기재되어 있다. 더 깊은 연구를 통하여 이용우의 작품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
1920년대 이용우는 서회미술회를 졸업하여 전통적인 화법에 이미 능숙했다. 몇 년이 흐른 뒤에는 예술이라는 것에 많은 고민을 했을 시기이고 젊은 의욕을 보여줄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실경이나 서양화법 도입을 시도하려 했던 <동연사>에 동인으로 참가할 정도였다면 이 작품이 1920년대 작품으로 추측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작품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시골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다. 특히 초동이 개와 함께 나무 한 짐을 지고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이나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 풍경을 빗대어 본다면, 1920년대 작품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 동양화에서 화제를 쓰는 것도 흔한 일이고 간지나 서명을 대신하여 백문인이나 주문인을 찍는 일이 당연하지만, 여기서는 볼 수 없다. 이런 것도 서양화의 영향 때문에 시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다만 오른쪽 하단에 단 하나의 도장만 찍혀있어 제작연대나 화제를 알 수 없다. 이런 점도 1920년대 작품으로 추측하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의 재주를 볼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아서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개나 초동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의 표현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개가 뛰어가는 동세나 초동이 묵묵히 지게를 지고 가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여타 다른 산수화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어색한 표현이 아니다.
그림은 아름다운 것을 그려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지킨 목불 장운상
목불 장운상은 (木佛 張雲祥, 1926~1982)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1952년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이당 김은호 제자인 월전 장우성으로부터 채색화법을 배웠다. 따라서 월전의 화풍과 이당의 신감각주의와 근현대적인 감각이 들어간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목불 장운상은 인물화에 능했고, 특히 곱고 화사한 세계를 아름다움의 극치로 여긴 탓에 <미인도>를 많이 그렸다. 대학시절부터 국전에 참가하여 1961년에는 추천작가가 되었다. 1960년 <묵림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하여 1회전에 출품도 했으나 그와 다른 작품세게를 추구했던 묵림회와는 맞지 않아 바로 탈퇴했다.
지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일(閑日)>, 종이에 채색, 1972년
한가로운 날이라는 뜻으로 붙인 제목답게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모여 음악을 듣고 있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가야금과 생황을 연주하고 있지만 곧 피리나 장구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듯 화면에 등장하고 있다. 화사한 환복과 고운 열굴을 여인들이 모여 정겨운 국악을 듣는 장면은 추운 이 겨울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철학은 그림은 아름다운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당연히 <미인도>였다. 그의 작품은 한때 달력에 그림이 실리는 유명 작가이기도 했다.
지금 이 전시와 동시에 열리는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도 함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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