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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립미술관박물관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by !))*!))* 2023. 11. 16.

평생, 그림 그리는 일과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만 열중하던 장욱진은 '심플'(단순)이라는 말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표현했다.  대부분 자신이 자유로이 운용할 수 있는 30, 40㎝ 넘지 않는 크기로 그림을 그렸다.  서울대학교 교수직도 몇 년 만에 던져버릴 정도로 그림과 자연과 교감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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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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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 장욱진(1917~1990)의 일생

스스로 '쟁이'라고 불리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서울을 벗어나 덕소에 처음 작업실을 차려 12년을 지내다가 서울 명륜동으로 옮겼으나 다시 수안보로 옮겼다. 각 5년 정도씩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구성(현재 신갈)으로 옮겨간 뒤, 5년 여만에 작고한다. 장욱진에게 있어 작업실은 그의 작품 변화를 가장 적절하게 구분하게 한다는 점을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하고 있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충남 연기에서 1917년에 출생한 장욱진은 1930년에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중퇴하였다. 다시 1936년에 양정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한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전신인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고, 1943년에 졸업한다.

 

1944년 귀국하여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동원되었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1948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1952년까지 동인전 활동을 했다.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대학교에 1954년에 대우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1960년에 사임하고 작업에만 몰두하기로 한다.

 

1963년에 덕소 한강가에 슬라브 양옥으로 작업실을 짓고 홀로 작품 제작에만 매달린다. 이후 명륜동을 거처 수안보, 신갈 등 조용한 시골을 찾아 평생을 심플(단순)이라는 작업 혹은 생활신조에 따라 자연과 교감하면서 1990년까지 작업에만 매달렸다.

 

장욱진 회고전에 설치된 전시장 입구장면
전시장 입구

 

 

 

 

화가 장욱진의 작품에 관한 짧은 단상

그는 일상의 풍경과 가족과 주변 사람을 소재로 삼아, 이들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기본적 도형 혹은 기호로 그려낸다.  화면 운영은 비사실적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게 구성하며, 색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최대로 절제했다. 이런 경향은 해가 갈수록 짙어진다.

 

이런 그의 예술세계는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추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60년대 초반에 그린 몇몇 작품에는 기본적인 도형과 흑백조의 색으로 구성된 것이 있어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하기 쉽지 않다. 이후 장욱진은 이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회복하면서 돌아왔다고 할 수 있으나, 색 사용법이나 붓의 운용법에서는 산수화의 먹과 붓의 사용법에 유사하게 변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깊어진 예술세계로 보다 여유로운 마음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70년대 중엽까지, 덕소 작업실에서 제작한 작품에서는 이런 과감한 생략과 치밀한 소재의 구성과 운영법이 관람자에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과감하게 생략하고 압축된 소재들과 캔버스 화면의 질감과 색감이 조화롭게 어울린 그의 작품은 고고하고 상징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특히 이런 화법과 평생 주창한 심플(단순)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작은 크기 작품만을 고집스럽게 이어온 것이 관람객에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이후 명륜동 시절과 수안보 시절에는 이전의 형식에서 벗어나 과감히 동양화의 산수화처럼 물감의 번짐과 관념적인 소재로 조금씩 변화한다. 현실에 있는 풍경을 비사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로 전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평생 단순한 것을 추구한 것처럼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한 것은 손바닥에 받쳐질 정도로 작은 크기 작품을 제작했다는 점이다. 다만 한지에 먹으로 그린 다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가장 진지한 고백 : 장욱진 회고전에서 내가 뽑은 베스트 5

집과 아이, 캔버스에 유채, 45.5×27㎝, 1959

장욱진의 집과 아이라는 작품으로 1959년에 그린 것이다.

유채색 사용은 최대한 절제하고 낮은 채도를 가진 색으로만 화면을 차분하게 이끌고 있다. 다만, 왼쪽 상단에 상징기호로 변환된 태양과 오른쪽 중앙에 가지만 남은 나무를 붉은색으로 살짝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기다란 직사각형 집에서 가장 큰 방에 원과 삼각형으로 표현한 아이가 꼼지락거리 듯이 누워있다. 삼각형 쪽지점에 원을 맞닿게 하여 관람자가 움직임을 느끼게 한 것에서 작가의 뛰어난 조형어법을 엿볼 수 있다. 

 

기다란 직사각형 집도 위쪽으로 지붕과 화면 끝이 맞닿아 있고, 마찬가지로 아래쪽 화면 끝에 섬돌을 희미하게 표시한 것도 장욱진의 수많은 고민으로 창조된 예술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캔버스 화면 속에 있는 직사각형 집은 비스듬히 기울어 있어 자칫 지루한 시각적 느낌을 배제하면서도 불안한 느낌까지는 도달하지 않도록 절묘하게 각도를 잡아냈다. 

 

이 작품은 집과 아이를 소재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술의 조형법 혹은 모든 사물의 원형태인 사각형과 원과 삼각형으로 구성한 작품이라고 해 전혀 무색하지 않다.

 

 

 

 

가족, 캔버스에 유채, 31.5×32㎝, 1954

장욱진의 가족으로 1954년 작품이다.

한반도가 1950년에 한국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휴전한 상태였지만 장욱진은 오히려 자신의 예술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작품을 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만큼 다양한 색과 많은 사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제작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시기는 짧아, 50년대 후분에 이르면 정제된 색과 최소한의 사물만 등장하는 화풍으로 변한다. 개인적으로 서울대학교 대우교수로 직업을 갖게 되면서 생활에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다.

 

<가족>은 몇몇 화려한 작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하는 것은 등장 사물에서 움직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화면을 세 부분으로 구획하여 가운데 부분에만 가족과 집과 나무 그리고 많은 동물을 등장시킨다. 나머지 부분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아래 부분에만 기다랗게 자신의 사인만 넣었다.

 

가운데 부분만 보면 오밀조밀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돼지, 소, 닭과 같은 가축만이 아니라, 새와 나비에 움직임을 부여해 관람자의 시선을 흐트러트리고 있다. 이 부분도 장욱진의 다른 자품들과 차별되는 점이다.

 

그리고 마을이 있는 부분과 정원이 있는 부분 그리고 집이 있는 부분을 둥글게 구획하여 전체적으로 화면에서 즐거운 기분이 퍼지도록 했다. 작가의 천진스러운 장난기는 오른쪽 아래에 그린 소의 눈을 한쪽만 그린 것에서 드러난다. 그것도 도드라지게 검은색으로 그려 관람자에게 웃음 짓게 한다.

 

 

 

 

천막, 캔버스에 유채, 37.5×45㎝, 1973

장욱진의 천막이라는작품으로 1973년에 그렸다.

심플, 단순이라는 말이 순간 떠오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엄청난 절제력과 묘사력,  그리고 무엇보다 색의 제어에 세심하게 신경 썼다는 것을 알게 한다.

 

사각형 공간 속에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는 세 사람과 하늘에 붉은색으로 살짝 표현한 해와 그 옆에 하늘 공간을 날카롭게 가르고 있는 새, 이것이 이 작품을 구성하는 전부이다. 그럼에도 관람자는 이 장면을 충분히 상상하고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작은 작품이지만 전혀 작다고 느낄 수없게 만드는 장욱진 화가의 예술 능력을 볼 수 있다.

 

사각형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검은 선은 철저히 통제하면서 공간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제각기 다른 자세로 있는 세 사람도 천막을 구성하는 선처럼 세심하게 구성하고 있다. 만약 이 선들을 두껍게 그렸다면 이 작품의 분위기는 완전히 깨져 어떤 감동도 만들지 못하는 평범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까치집, 캔버스에 유채, 13.6×27㎝, 1977

장욱진 작품

장욱진의 작품 작품 중에서도 더 작은 작품이지만 작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다. 단, 두꺼운 액자 틀이 온전히 작품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기다란 버드나무 가지 속 까치집에 앉은 까치가 꿈꾸는 것인지, 내가 꿈꾸는 것인지 흰 구름 속에 그리운 고향인 듯, 마을인 듯 그렸다. 이 부분만 배경을 거의 흰색으로 그린 것이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오른쪽 가운데 부분에 걸린 푸른색 반달이 화면에 또 다른 재미를 부여하고 있는 요소이다.

 

 

도인, 캔버스에 유채, 1978

장욱진 작품

장욱진의 작품은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감상자들이 천진한 마음, 아이 같은 마음, 단순한 풍경 등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화가로서, 예술가로서 엄청난 고민과 고민 속에서 탄생한 구성이라는 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노력한다면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도인>, 이 작품도 스치듯이 지나가면 작가의 상상력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수많은 고민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다. 가운데 등장하는 두 사람이 도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턱수염과 콧수염, 앉은 다리 모양을 다르게 표현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두 사람 아래에는 작은 아이를 그려 넣었고, 그 아래에는 초록색 나무 두 그루 사이에 붉은 기둥을 한 기와집을 그렸다. 나무 위에 그린 새도 사람들처럼 차이가 나다. 둥글둥글한 모습, 가늘고 긴 부리를 가진 모양, 긴 꼬리를 가진 파랑새, 짧은 꼬리를 가진 붉은 새 이렇게 음양(陰陽)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늘에는 분홍색을 한 해와 집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를 일렬로 그려 윗부분과 아랫분분이 화면에서 힘의 조화를 이루도록 구성했다. 당연히 색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묘사하기 위한 붓질이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색을 만들어 나갔다.   

 

작지만 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장욱진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 관한 짧은 단상

장욱진이라는 화가가 일생동안 그린 작품을 한 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줄 수 있으나, 한두 가지 부분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 

 

공간이 가진 규모의 한계이겠지만, 전시된 작품 숫자가 많아 관람자의 원활한 감상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장욱진의 작품처럼 작은 경우는 관람자는 작품에 가까이 다가설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원활한 감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지하고,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찾아 디스플레이가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조명은 작품을 더 잘 볼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자 필수적인 요소이다. 조명기구가 워낙 고단가이지만 그럼에도 국립이라는 명칭에 맞게 갖추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들쑥날쑥한 조명은 작품 감상을 많이 방해한 요소라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장욱진 회고전>이라는 제목도 시의성과 시기성이라는 점에서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굳이  이런 점을 들먹거리는 것은 '진지한 고백'이라는 제목과 함께 붙인  기획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많은 고민과 연구 속에서 이루어진 전시일 것이므로 이런 지적은 지엽적이다. 그저 아쉬웠던 부분을 투덜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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