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아프리카 가봉의 팡족(Fang)이 의식에 사용했던 은길 마스크(Nigl Mask)가 프랑스 남부 한 경매에서 420만 유로(약 60억 원)에 2022년에 낙찰되었다. 원소유주이었던 프랑스 노부부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요구하는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수익금을 돌려줄 이유가 없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노부부는 이 물품에 대한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은길 마스크(Ngil Mask)가 경매에 나오게 된 경위
프랑스 중부에 사는 80대 노부부는 알레스 남부 마을에 있던 자신들의 별장을 치워달라고 한 중고물품을 취급하는 딜러에게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별장은 노부부의 할아버지인 르네 빅터 푸르니에(René-Victor Fournier)가 소유했던 것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식미지 총독이었던 르네 빅터 푸르니에가 1917년쯤에 알 수 없는 경위로 이 가면을 소장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면은 별장의 찬장에서 발견되었으며, 청소를 돕던 딜러는 노부부에게 150유로(약 210,000원)를 지불하고 이 가면을 구입한다. 가면은, 2022년 3월,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 시에서 열린 경매에서 4,200,000유로(약 60억 원)에 낙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노부부는 딜러가 물품의 가치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고, 실제 가치를 오해하도록 했다며 경매 수익금 일부를 요구하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마스크를 구입한 딜러는 자신도 마스크의 실제 가치를 알지 못했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마스크를 경매에 출품했을 때 추정 가치인 300,000유로를 이 노부부에게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딜러의 선의에 의한 제안이었다. 참고로 경매에서 마스크의 가치는 300,000~400,000유로였다. 그러나 노부부는 이 제안을 거절하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딜러 역시 자신이 선의로 한 제안을 철회했다. 노부부는 3십만 유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얼마 전, 법원의 판사는 수익금을 돌려줄 이유가 없다고 딜러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딜러의 변호사나 노부부의 변호사는 '이런 물건을 포기하기 전에 좀 더 호기심을 가져야 하고, 귀한 물품이라는 가능성이 있다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가치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했다.
결국 프랑스 80대 노부부는 세계에서 10여 개 밖에 없는 은길 마스크를 150유로에 판매한 것으로 이 사건은 끝났다. 은길 마스크를 낙찰받은 사람은 추가비용과 수수료를 더해 지불한 총액은 525만 유로(약 75억 원) 정도이고, 2006년에 이와 비슷한 마스크가 프랑스 파리 경매에서 590만 유로(약 85억 원)에 낙찰된 기록이 있다.
은길 마스크(Ngil Mask)는 무엇인가?
19세기 아프리카 가봉의 팡(Fang)족(사하라 아래 적도 기니, 가봉 북부, 카메룬 남부에 있는 가장 큰 민족)이 사법 및 경찰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의를 보호하고 관리하며 씨족과 마을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은 남성 그룹인 은길(Ngil) 비밀조직이 씨족에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거나, 마을의 말썽꾼을 찾아내는 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료는 가벼운 카폭(kapok)이라는 나무에 얼굴 조각을 하고 표면에는 흰색 점토(카올린)로 전체를 발랐다. 여러 식물성 섬유를 사용하여 수염과 머리를 표현하였다. 넓고 둥근 이마와 하트 모양으로 눈과 코를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턱과 입은 대체로 붙어있어 구분하기 어렵다. 은길 마스크는 힘센 고릴라 얼굴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스크는 전 세계적으로 19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는 10개에 불과하다.
간송미술관 설립자인 간송 전형필이 소장품 중에서
간송 전형필은 우리나라의 귀한 문화재를 수집하고 지켜낸 인물로 간송박물관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가 수집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 은길 마스크 경우와 비슷하게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가치를 알아보고 귀중한 문화재로 인정받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국보 제294호인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이 발견되다.
이 병은 1920년대 팔당 인근에서 할머니가 나물을 캐다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할머니는 가늘고 긴 병을 보고 목이 길어 참기름 담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해 집으로 가져왔다. 할머니는 실제 이 병에 참기름을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병값이 아니라 참기름 값으로 1원에 팔린 병은 여러 사람을 거쳐 한 골동품상 눈에 띄게 된다. 이 병이 백자임을 알아본 그는 그 병은 수집하고는 이후에 60원을 받고 되팔았다. 이후 여러 수집가를 거쳐 1936년 서울에서 열린 경매에서 당시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가에 낙찰된다. 그 낙찰자는 바로 간송 전형필이었다.
1920년대는 나라를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가던 시기에 일반 대중의 삶은 척박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나라의 운명보다는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할머니는 나물을 캐고, 참기름을 짜서 시장에 내다 파는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다. 거기에 역사와 문화와 예술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땅에 묻혀있던 병을 버리지 않고 그 쓰임새를 용케 찾아내서, 이 병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한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필요 없는 것이지만, 만약 할머니가 아무 관심 없이 그대로 두었다면 아니면 깨뜨려 버렸다면, 우리는 이 훌륭한 도자기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이란 것에 문화라는 것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이 병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1963년 보물 제241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국보 제294호로 재지정되었다. 지금의 가치로는 1백억 원에서 120억 원으로 추정된다.
1936년 11월에 열린 경매에서 14,580원에 낙찰되다
여러 손을 거쳐 이 병을 소장한 이는 일제 강점기 때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 은행장이었던 모리 고이치(森 悟一)였다. 그는 당시 손꼽히는 미술품 수장가였으나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살아생전에 누구에게도 소장품을 보여주지도 팔지 않았던 그가 아무런 유언도 없었기에 그의 유족은 많은 미술품 처리에 난감하게 되었다.
이에 경성미술구락부 사장인 사사키가 이 정보를 입수하고 그의 유족에게 다가가 고인의 추모형식을 경매 전시회를 제안하고 이를 그의 유족은 받아들인다. 이렇게 성사된 경매는 단숨에 조선과 일본에서 많은 골돌품 수집가에게 관심을 얻게 된다. 이때 간송 전형필은 젊은 미술품 수집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기에, 온고당 주인인 심보 기조(新保 喜三)를 경매 대리인으로 내세워 입찰하기로 한다.
간송 전형필의 상대는 일본 교토 야마나카상회(山中商會) 사장인 야마나카(山中)였다. 본점은 교토에 두면서 조선을 비롯해 뉴욕, 파리, 런던, 북경에 지점을 둔 당시 세계적인 미술품 판매상이었다. 그가 이 병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로 온 것이다. 이 시기에 백자는 2,000 원 이상으로 팔린 물건은 없었다. 군수 월급이 70원, 20칸짜리 기와집이 2,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경매장은 좋은 작품은 일본인이 약간 처지는 것은 한국인이 낙찰받았고, 그마저도 순식간에 낙찰되었다. 이윽고 전반부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간송 전형필이 기다리던 이 병이 순서가 되었다. 맨 처음 호가하는 금액이 모두의 관심사였다. 첫 호가는 500 원, 이어 바로 2,000 원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6,000 원'
'7,000 원'
'8,000 원'
경매사가 '더 이상 없습니까?' 하고 묻는 순간
"9,000 원이요." 드디어 야마나카가 등장했다. 간송의 대리인인 온고당 주인인 심보가 10,000 원을 불렀다.
이제는 간송과 야마나카의 대결이었다. 야마나카가 10,500 원을 부르자, 오백 원 단위로 경매가는 올라갔다. 심보가 '14,500 원이요'라고 하자,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강적을 만난 야마나카는 작은 소리로 '14,510원'을 불렀다. 야마나카의 기세가 꺾인 것이다. 이를 알아챈 심보는 '14,580 원'을 불렀고 이것이 이 병의 낙찰가가 되었다. 20칸 기와집 20채를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은?
18세기 전반기에 경기도 광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백자는 최고의 도자기 제작 기술이 총동원 작품이다. 조선 시대에 순백자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청화백자가 조선의 검소하고 품격 높은 미적 가치를 두고 제작했던 것에 비해 장식의 화려함에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난초는 회청이라 불렀던 코발트 안료로 푸른색으로 표현하고, 국화는 철과 구리로 갈색과 붉은색으로 표현했다. 이들 안료는 가마 온도를 잘 조절해야 색을 제대로 낼 수 있는 것으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기장이 아니면 어려운 기술이었다. 조각도 일품이다. 벌과 나비, 그리고 국화와 난초는 모두 양각으로 표현했으나, 색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도드라지지 않는다. 가늘고 긴 목과 팡팡하게 솟은 둥근 몸도 단순하지만 장식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있던 것을 증명하듯 몸에 가득히 난 빙열 사이에 옅은 선들이 시간의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비록 땅 속에서 안료가 산화되어 색이 많이 바래서 생동감은 덜하지만 노숙한 완숙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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