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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시장

김경승 소년입상 조각으로 본 미처 깨닫지 못한 문제

by !))*!))* 2023. 12. 12.

김경승(1915~1992)은 김복진, 윤효중, 권진규 등과 함께 근대미술기에 등장한 조각가이다. 서양식 조소기법을 소화해 낸 그의 초창기 작품은 여타 근대기의 다른 조각작품들처럼 대부분 소실되었다. 우리가 여러 사회적 격동을 겪은 탓에 보관도 어려웠고, 파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고로 제작되었던 김경승의 <소년입상>은 보존되어 27여 년 만에 다행히 청동(브론즈)으로 완성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미처 깨닫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김경승의 예술 일생과 근대조소가 갖는 성격 

서구의 조소기법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해 낸 최초의 인물로 대개 김경승을 꼽는다. 아카데미즘 양식(이 부분도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을 받아들인 서양화가로 잘 알려진 김인승(1911~2001)과 네 살 터울인 동생으로 태어난 김경승(1915~1992)의 고향은 개성이다. 형이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했던 과정을 그대로 따라,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에 졸업했다. 형은 서양화를 동생은 조소를 일본에서 배워 한국 근대미술을 개척한 형제인 것이다. 그는 1937년부터 <조선미술점람회>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1942년에 추천작가가 될 때까지 여러 번 특선을 했다.

 

이 때문에 해방 직후 모든 미술인 모여 만든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후 경성사범학교, 풍문여자중학교 미술교사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9년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중등미술교과서 발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55),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상>(1958), <김구선생상>(1968) 등의 동상과 공공조형물 제작에 참여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근대 이전에 기념물이나 동상 혹은 종교에서 필요한 상징물을 주로 제작하던 조소는 동서양이 비슷한 궤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불교조각과 아울러 금속을 사용하여 제작한 생활용품에서 볼 수 있는 기법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권진규는 불교조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가 권진규가 새겼던 글귀에서

조각가 귄진규는 아뜰리에 벽에 '범인에겐 침을 바보에게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라는 글귀를 적어놨더란다. 예전에는 무심히 넘겼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뜻이 비수로 다가온다. 범인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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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작 동기와 형식이 전혀 다른 조소, 즉 미술작품(여기서는 간단히 순수예술로 정의한다.)으로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일본을 통하여 서양미술이 수입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시기(시기에 대한 구분도 복잡한 문제이긴 하다.)에 조소뿐만 아니라 여타 장르도 제작 동기에서부터 전통적 인식과 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래전부터 공예와 불교조각에 형성된 우리의 사회적, 환경적, 심미적 요소와 달리 근대조소는 예술 자체행위가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려는 김경승의 <소년입상>은 소재와 재료, 사용된 테크닉, 작가의 미의식과 그를 둘러싼 당시 근대라는 사회적 환경 등과 복합적으로 파악될 때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당연한 연구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인상적인 수준에서 그의 <소년입상>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한편, 근대조소 도입기인 1930년대에는 김복진과 몇 작가들은 미술의 민족주의적 방법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김경승의 작품은 서구의 고전적 조소기법을 잘 습득한 작품 중에 하나라는 사실로부터 바라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김경승 작품 <소년입상>(1943, 청동, 140.5×38×43.4cm)

김경승의 소년입상으로 석고로 된 것을 1971년에 청동으로 제작
김경승, 소년입상, 청동, 149&times;38&times;41cm, 1971(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소년입상>은 약 10살 정도 되는 소년이 뒷짐을 지고 조용히 서있는 자세를 한 작품이다. 짧은 머리와 반바지 차림인 소년은 살집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체격은 다부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초점을 잃은 눈과 아주 약간 벌어진 듯한 입과 고개를 숙인 머리는 그의 몸체가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상념에 젖은 표정이다.

 

소년의 자세는 서구의 가장 고전적인 자세(그리스의 조각으로부터 완성된 contrapposto)를 완벽하게 재현해 낸 김경승의 테크닉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밀로의 비너스>와 자세가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930년대에 주로 만들어졌던 여성의 누드(이 부분은 현존하는 사진으로만 파악할 때)와 달리 1940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김복진의 <소년입상>(원작망실) 사진과 일정한 맥락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김복진의 당당한 자세와 달리 김경승의 소년입상은 다소 수줍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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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서구적 테크닉을 완벽하게 구사할 능력을 가진 김경승이 <소년입상>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일본이 야기한 전쟁 상황을 생각하면, 어딘가 불균형을 이루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조선의 한 작가가 우울한 혹은 깊은 사색에 잠긴 소년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에 관한 해석으로 당시에 김복진, 윤희순, 고유섭 등이 주장한 「민족미술론」 내지는 「향토색론」에 경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1942년 추천작가가 되면서 한 인터뷰(매일신보 1942. 6.3)에서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린다’고 말한 것에서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일본인의 의기와 진념을 표현하는데 자신의 미력을 다한다’는 말은 어쩌면 당시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소위 <대동아>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1941년부터 발발한 전쟁이 가져온 사회상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당시의 모든 사회적 역량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 그의 언급은 아쉽지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년입상>은 당시의 사회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소년입상>은 김경승이 추천작가 자격으로 제22회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 당시에 출품된 작품 재료는 석고였다. 조소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철과 돌과 같은 영구적인 재료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잠깐 조소라는 이름을 정리하고 가자. <조소>는 '조각'과 '소조'라는 두 가지 제작 방법을 합친 말이다. 조각은 돌, 나무 등을 깎는 방법, 소조는 점토 등을 붙여서 만드는 방법이다. 조각과 달리 소조는 점토를 이용한 것이므로 이를 항구적인 재료 즉 청동으로 제작하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이를 석고로 옮겨 틀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만든 틀에 녹은 청동을 붓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년입상>은 1943년 석고로 된 것을 출품했기에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전쟁으로 일본이 미술작품 재료로 귀한 청동을 사용하게 했을 리 없다. 무기를 만드는 구리를 눈에 보이는 대로 모조리 뺏어가던 시절에, 작품을 만든다고 청동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이 시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여러 조소 작품은 대개 석고가 많았다. 그런데 석고라는 재료 때문에 현대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문제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소년입상>(1943, 청동, 140.5 ×38 ×43.4cm)

김경승의 「소년입상」은 소재에 있어서 비록 조선소년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해도, 기법이나 모델 접근방법은 서구의 고전적 조소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근대에 서구의 미술양식을 도입하면서 그것의 기법이나 이념만을 충실히 소화하여 만들어낸 작품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비판은 한국의 전통적 조각기법과 연결하려는 주체적 의식이 부족하고, 보다 한국적 미적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김경승만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 제작시기의 사회적 여건과 현재 우리가 처한 사회조건과 혼동하면 충분히 이런 비판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혼동된 관점으로 그의 작품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김경승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의도와 의식이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배어있는 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미의식을 제대로 드러낸 작품인지 아니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한 것인지 구별하는 것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1943년에 제작된 상태 그대로 브론즈로 만들어졌냐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제작당시는 석고로 되어있던 것을 1970(71?)년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소년입상>이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만 아니라 개인소장자가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증거는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는 작품 크기를 비교해 보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작품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하나씩 나열해 보자.     

 

1. 1943년 전람회 출품했던 석고 그대로 청동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볼 때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석고를 청동으로 전환할 때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석고는 파괴된다. 틀을 얻기 위해서는 석고를 부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동으로 제작할 때 작가의 철저한 감독 아래에 서명과 에디션 번호를 정확히 기재하면 문제가 없다.

 

여기서 작가의 감독이 중요하다. 물론 제작소에서 양심적으로 제작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사실 에디션이라는 개념이 철저하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 십 년 전에 만들어진 청동조각에 에디션 번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제작소에서 임의로 제작했을 경우의 수도 충분히 존재한다.   

 

2. 1943년 전람회 출품했던 석고에 작가(생존) 어느 정도 수정을 더해서 청동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볼 때 

석고로 제작할 경우 충분히 자료와 사진 그리고 제작과정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자료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이런 자료가 있다면, 1943년에 제작했던 결과물과 1970년에 청동으로 제작한 작품을 비교해봐야 한다. 

 

비교해서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판단되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제작연도를 1943년이라고 기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수십 년을 걸려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청동으로 주조한 연도도 70년, 71년이라고 다르게 논문에 기재된 것만 봐도 우리가 자료를 얼마나 허술하게 다루는지 알 수 있다.

 

3. 어느 시점인지 모르지만 이미 1970년 이전에 청동으로 제작되었다고 볼 때 혹은 그 이후에 제작되었을 때

청동으로 언제 제작되었는지 그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때 청동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틀을 만들었던 때도 있었다. 재료의 발달로 청동으로 된 원본을 파괴하지 않아도 틀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청동 작품은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틀은 수축 하여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이다.(위에 기재한 작품 캡션이 서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연히 원본 작품과 크기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우리 미술시장에서 청동으로 된 조각 작품이 사라진 이유가 이것도 한 몫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앞으로 주거환경과 주택설계가 조각을 소장하기에 좋은 상황이 된다면 미술시장에서 청동 작품이 콜렉터에게 선호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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