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도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데 키리코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데 키리코의 예술세계를 알아보려 한다. 데 키리코 전시에서는 자화상과 초상, 형이상학 회화, 1920년대 전개, 회화전통으로의 회귀 : 네오 바로크 시대, 신형이상학 회화, 5개 영역으로 나누어 구성되는 듯하다.
1. 자화상
데 키리코 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작가도 드물 것이다. 1910년대부터 꾸준히 자화상과 여러 초상을 그렸다. 따라서 시대별로 변화하는 작가의 얼굴에서 세월과 작가의 생각이 변화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키리코가 왜 자신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이유는 나름 추측하면 자신의 심리 혹은 예술관을 그때그때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독일에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1911년부터 15년까지 머무는 동안 형이상학 회화에 관한 양식을 수립해 나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카를로 카라'와 형이상학 화파를 결성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작품은 마네킹과 여러 도구로 가득 찬 실내, 비스킷과 석고상 등 연관 없는 사물들이 등장한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에 1922년경에 제작한 자화상(우)이 있다. 왼쪽은 이보다 몇 년 전에 제작한 자화상이다.
두 작품에서 얼굴의 모습은 거의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미 형이상학 회화에서 바로크 시대의 화법이 등장하던 시기이다. 그래서인지 키리코는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왼쪽에 한 권을 들어 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형이상학(Meta Physica)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는 것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 자화상에서는 로마시대의 대리석 조각상으로 그린 조각을 마주한 자화상을 그려 은근히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 형이상학회 회화
1920년대 초까지 키리코의 형이상학 회화가 가장 인기가 높다. 이 시기는 니이체의 사상과 뵈클린의 낭만주의적이며 상징주의 화풍에 심취하던 시기이다. 가장 창작열 가장 활발하던 젊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성향을 즉, 우울과 불안 그리고 우수와 묘한 감정이 들게 하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왼쪽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한 소녀가 우리의 굴렁쇠를 굴리며 광장을 지나가는 장면이다. 전면에 아치형 건물은 키리코의 대표적인 이미지 기호로 등장하는 것으로 이런 구도는 지속된다. 오른쪽은 이탈리아 광장을 그린 것으로 가운데 붉은 탑이 있는 작품이다. 좌우의 건물은 왼쪽 작품과 비슷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왼쪽 작품과 비교하면 과도한 원근법이 많이 사라지고 어떤 기이하고 묘한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키리코의 작품을 찾아보면 비슷한 구도의 작품의 많다. 그만큼 조금씩 변형해서 제작한 작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런 화풍의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의미이다. 아래 작품은 오른쪽 그림과 거의 유사한 작품이지만 1913년 작품이다. 오른쪽 작품과 비교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미술관 소장품인 이 작품은 키리코가 니체에 가장 심취해 있던 시절의 작품이다. 가까이 있는 건물을 과도하게 끌어당겨 가운데 붉은 탑이 정면에서 화면을 압도하는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위의 작품과 다르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오른쪽 건물 뒤에 있는 기마상이 엄청난 압박감을 감상자에게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그것이 엄청난 크기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과도한 원근법 때문이다.
키리코의 형이상학 회화가 멜랑코리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를 나름 분석하면, 북향을 바라보는 풍경을 화면에 옮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강렬한 빛이 내리쬐는 늦은 오후에 북쪽에 난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면 어두운 실내와 밝은 실내가 강렬하게 대비된다.
즉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바라보면 그 퐁경이 매우 낯설고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등장한 소재들은 어릴 적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것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생경한 사물의 조합물이 등장하는 작품도 이 시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신형이상학 회화
1920년대경부터 데 키리코는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과 40년대에는 바로크 시기의 작품에 심취하여 서양 회화의 전통으로 회귀라는 평가를 받는다. 화려한 색채와 붓 터치가 살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지만,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배신했다는 악평을 받았을 정도이다.
이 시기의 작품도 동경도미술관 '데 키리코 전시'에 출품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소개를 생략하고 신형이상학 회화 작품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데 키리코는 말년에 다시 형이상학 회화에 매달린다. 세상을 떠나기 10여 년 동안 제작한 이런 화풍을 신형이상학 회화로 평가한다. 젊은 시절에 그렸던 광장과 마네킹, 신화에 등장하는 요소를 화면에 종합하여 자신의 젊은 시절의 작품을 재해석한 것으로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미 데 키리코의 예술적 영감이 많이 사라졌기에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그다지 좋은 영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1888년에 태어나 1978년에 세상을 떠난 데 키리코는 90년을 살았다. 데 키리코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부침이 있었다. 대부분 초기에 그린 작품,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하던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 주로 사랑을 받았고, 학자들에게 주된 연구대상이었다. 당연히 이 시기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쌌다.
이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1946년부터 휘말린 위작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의 9년이나 긴 법정공방을 이어간 이 사건은 결국 데 키리코의 주장대로 위작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하지만 2006년에 새로운 연구로 작가 본인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던 작품은 진품이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어 데 키리코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유명한 작가, 예술가라고 하면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까지 생각하게 된다. 마치 모든 것에서 선하고 관대하며 모든 것을 이해하는 그러니까 선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술가도 인간이고, 욕망을 가진 보통 사람이다. 그들이라고 보통의 인간보다 착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제작한 작품이 모두 걸작이고 훌륭한 예술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오해이다.
데 키리코 자신이 위작이라고 주장했던 작품은 2006년에 새로 제기된 주장에서는 작가 스스로 제작연도를 속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세계 미술계가 떠들썩했던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개인적으로 키리코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므로 확신할 수 없지만, 데 키리코의 전문가들은 위작이라고 했던 작품은 진작으로 결론을 내렸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예술가가 언제나 창조성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흔히 자기모방이라는 말로 이런 상황을 설명한다. 유독 키리코의 작품에는 이런 것들이 많다. 조금씩 구도만 바꿔서 제작한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이유는 그들의 창조적인 정신과 그것을 추구하는 자세를 보려는 것이지, 그들의 욕망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불안과 공허라는 우리의 현재 풍경을 닮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
동경도미술관은 데 키리코의 전시정보를 상세하게 홈페이지에 싣고 있다. 입장권 구입방법과 단체입장 그리고 전시일정도 자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우리 공립미술관도 이런 점은 배워 실천하여야 한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해야만 한다. 언제쯤 당연히 할 일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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