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서 사라진 동양화에서 서화미술화 시절의 동양화를 언급하기 전에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해 공식적으로 동양화라는 이름을 한국에 썼던 일본은 어떨까. 궁금해서 몇 개의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이를 먼저 언급하고 서화미술회 시절의 동양화를 정리하기로 한다.
1. 일본의 국공립과 사립미술관 사이트에서 찾은 동양화라는 장르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에서는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은 일본화(日本畫)로 이름을 바꾼지 150여 년이 넘었고, 중국도 국화(國畫)라고 사용한다.
일본 동경국립근대미술관 홈페이지 소장품 검색 항목에는 장르 구분은 일본화, 유채·기타, 수채, 소묘, 판화, 조각, 사진, 서(서예), 자료, 전쟁기록화, 영상 이렇게 구분되어 있다. 공립미술관인 동경도현대미술관 소장품 검색은 아래 사진처럼 되어 있다.
국립인 동경국립근대미술관과 동경도현대미술관에서 차이는 일본화를 회화(Paintins)에 포함하고 있느냐, 아니냐 차이뿐이고 거의 비슷하다. 그렇다면 한국에 많이 알려진 가네자와 21세기 미술관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가네자와 21세기 미술관은 아예 미술장르 구분 없이 키워드와, 작가와 작품 이름으로 검색하게끔 홈페이지가 구성되어 있다. 작가이름과 작품이름을 모르면, 검색하려는 작품에 대한 작은 정보라도 있어야 검색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장르에 대한 구분은 전혀 없다. 생각해 보면 일반인에게 장르 구분은 그다지 중요하지도,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미술작품이면 된다.
동경국립근대미술관과 동경도현대미술관에서도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장르를 구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근대미술을 주로 다루는 곳이므로 일본화가 있는 것이고, 현대미술을 다루는 곳에서 굳이 일본화를 따로 구분할 필요 없이 그림(회화, Paintings)라고 포괄적으로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장르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르 구분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동의가 없어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그다지 고민 없이 예전에 쓰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동양화라는 용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참고로 영국 테이트 모던은 아래 사진(오른쪽 하단 TYPE)처럼 되어 있다.
2. 조선 말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역사
먼저 서화미술회를 언급하기 전에 조선말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간단한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고종이 1863년 12살 나이에 즉위하고,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아 정사를 운영했다. 흥선대원군이 나라 문을 걸어 잠가 문호를 닫았지만, 1873년 고종 10년에 친정을 선포하면서 일본과 서구로부터 통상수교를 요구받는다.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1876년 고종 13년에 일본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은 뒤로 나라 문을 열었다. 이어 일본의 요구로 1876년 김기수를 정사로 하는 1차 '수신사'를 파견했고, 2차는 1880년에 김홍집을 파견했다. 김홍집은 돌아와 서구와 수호통상하여 산업과 무역을 꾀하고 서양의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1881년 시사유람단을 파견한다. 그리고 1882년에는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한다.
1882년 영선사에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이가 바로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이었다.
안중식은 같은 장면인 '백악춘효'를 왜 두 점 그렸을까? 그것도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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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 안중식은 1915년 한 해에 백악춘효를 두 점 그렸다. 이미 나라는 잃어, 나라의 궁궐마저 허물어 물품 전시장(일본 총독부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으로 전락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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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은 같은 장면인 '백악춘효'를 왜 두 점 그렸을까? 그것도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 2편
안중식은 같은 장면인 '백악춘효'를 왜 두 점 그렸을까? 그것도 같은 해 여름과 가을에 - 2편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은 우리 근대미술 태동에 있어서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 1853~1920)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관료이자, 도화서 화원이자, 동양화가였다. 고종이 나라 부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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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이런 개방정책에 자신들의 위치에 불안을 느낀 세력이 등장한다.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대우한다는 표면상의 이유로 발생했던 구식군대 '무위영'과 '장어영' 군들이 일으킨 것이 임오군란이다. 이 일로 계획을 다 수행하지 못하고 청나라 영선사로 파견 갔던 안중식과 조석진은 1년 만에 돌아오고 만다. 이에 대한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3일 만에 실패로 가는 역사를 썼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을 통한 서양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술, 회화, 사진 등 서화로만 알던 그림을 서양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양화라는 말도 일본이 자신들의 그림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말인 양화를 그대로 도입해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은 이미 전근대적인 체제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운동의 기세가 높아지자 청과 일본의 군대가 파병되었고, 조선과 일본 연합군에 의해 동학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를 빌미로 일본이 내정 개혁을 요구하자, 갑신정변으로 밀려있던 세력인 김홍집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시행한다.
이런 사태 속에서 청과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일본이 승리했다. 이에 고종과 왕비 민씨 일파는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했지만, 위기를 느낀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여기서 아관파천이라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일도 생기게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근대적인 정책을 펼쳐 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즈음에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이 깊어져, 결국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이에 일본의 강요에 의해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황실은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고,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는 폐지되고 대신, 일본 궁내성 소속인 이왕직(李王職)으로 축소, 이전된다. '도화서'(圖畫署)와 '화원'은 있었지만, 역할과 명성은 줄어든다. 대신 사회에서는 '서화미술회'가 등장하고, '동양화'라는 이름이 유통된다. 지금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 시작이다.
이런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결국 나라를 잃은 시절에 지식인과 의식 있는 이들은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3. '동양화'라는 이름의 등장
나라가 외세를 이기지 못하고 점점 기울어져갈 때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고종도 일부 지식인도 중국(청)과 새롭게 떠오른 일본을 보면서 근대국가로 나아가려는 열망이 쌓여갔다. 이에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신문사를 세워 민중의식을 깨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교와 신문사는 우후죽순으로 탄생한다.(물론 여기에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 지식인은 중화라는 이념을 대표하는 중국이 아니라, 동양 즉 서양에 대응하는 동양이라는 이념을 창출하고 역사를 일깨워 민족의식을 높일 수 있다는 사상이 등장한 시기였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면서도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연원을 동양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이 부분도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일본은 이미 1872년 독일어의 번역으로 미술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했고, 회화라는 말도 1882년 내국회화공진회에서 처음 공식으로 사용했다. 이런 용어는 신사유람단 일원이었던 이현영의 일사집략에 미술이 등장하고, 한성순보(1884)와 유길준의 서유견문록(1895)에도 이어서 등장한다. 또 새로운 문물이었던 유화는 양화(이미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명칭)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일본 상황을 말하는 김에 전통적으로 우리는 시서화를 하나로 보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일본도 비슷했다. 하지만 회화라는 말이 등장한 1882년 서화(書畵)에서 서(書)를 분리했다. 별 다른 저항 없이, 서는 미술(예술)이 아니라라는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화라는 용어는 1907년 문부성미술전람회가 창설했을 때부터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소위 동양화도 참여했었다고 김은호 편에서 언급했다. 여기서 일본인 화가들과 조선인 화가들 일본화, 조선화 그리고 문인화, 산수화를 포괄하는 용어로 동양화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로 발표된 글에서 동양화라는 이름을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동양화는 장안에서 익숙하게 되었다.
이렇게 등장한 동양화라는 장르는 1911년 《서화미술회》가 등장하면서 더욱 공고히 다져진다. 《서화미술회》는 1911년에 《경성서화미술원》으로 발족했으나, 1912년에 이왕직과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며 재조직되어 출발하였기에 개인 교습소는 아니며, 그렇다고 공식적인 기관도 아니다.
교원은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 1855~1921),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 1853~1920), 위사 강필주(渭士 姜弼周, 1860?~1930?), 관제 이도영(貫齋 李道榮, 1884~1933)을 비롯해 객원 교원으로 당시 유명 서화가들이 오갔다. 서(書)과와 화(畵)과로 구분하여 수업 과정은 3년이었다.
졸업생은 정재 오일영(靜齋 吳一英, 1890~1960), 춘전 이용우(春田 李用雨, 1902~1952),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심향 박승무(深香 朴勝武, 1893~1980),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 1899~1978), 정재 최우석(鼎齋 崔禹錫, 1899~1965),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기 이전 즉 소위 관전에 시작되기 전에 우리의 근대미술 아니 동양화를 지켜낸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각자 개인사적인 공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과가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동양화, 한국화를 논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국립현대미술관 회화 1, 회화 2를 말하다가 말이 많았다. 국공립미술관은 시민을 위한 기관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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