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로만 한정한 비엔날레가 비엔날레로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2024경기도자비엔날레이다. 온갖 비엔날레가 있으니 도자비엔날레가 있는 것이 특별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경기도자미술관 주차장에서 미술관 앞마당에 들어서자 나이브한 한국의 현대공예 현실을 보고 말았다.
리차드 세넷 <투게더>라는 책
몽테뉴 고양이부터 생각해 보자.
현대미술 전시에 관한 블로그나 카페에 올라온 글은 주최 측에 내보낸 글을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다. 대부분 그렇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취향을 모르거나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스스로 해석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앵무새 행동을 한다.
이런 모습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집에서 고양이 키울 자신은 없고, 길고양이에게 편의점 사료를 주면서 동물을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답게 고양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들이대는 모양새이다. '고양이 그것도 유명한 몽테뉴가 고양이를 말했다'니 딱 이 정도인 것 같아 심드렁하다.
자기 과시와 자기만족에 사족을 못쓰는 우리답게 유명하다고 하면, 좋다고 하면, 수준이 높다고 하면, 앞뒤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세를 보인다. 스스로 유명하다고 판단하고 수준이 높다고 의견을 내고, 이성을 가지고 논리로 판단하려는 자세 없이 남들의 말에 쉽게 동조하는 것, 그것 이상이 아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몽테뉴 고양이가 과연 그만큼 의미가 있을까. 리차드 세넷이 말하는 몽테뉴 고양이가 제대로 된 해석일까? 성격 급해서 결론부터 내면, 경기도자비엔날레 본전시에는 몽테뉴 고양이는 없다.
본전시는 세 파트로 나뉘어 각 파트별로 주제를 정하고 있다.
파트 1 세계와 함께: 순환하는 대지의 질서
파트 2 타자와 함께: 우정에 대하여
파트 3 자신과 함께 디지털 세상 속에서
도자비엔날레 주제는 리플릿에 적혀있듯이 투게더-몽테뉴의 고양이(Together-Montaigne's Cat)이다. 리차드 세넷의 <투게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Together : The Ritual, Pleasure And Politics of Cooperation>라는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주제이다. 그러면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투게더' 영문 제목과 번역본과 다르다. 영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함께: 의례와 놀이 그리고 정치학과의 협력이다.> 그러니까, 의례에 관한 협력, 놀이에 관한 협력, 정치학에 관한 협력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러면 의례와 놀이에 협력 그리고 정치에 왜 협력이 필요한 것일까? 이를 아는 것이 애 책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의례를 보자. 의례(儀禮)를 구성하는 한자 뜻을 해석하면 '예도, 예절을 표현하는 법도와 법식 즉 형식'이다. 우리가 명절에 조상에 지내는 제사는 절을 하고 술을 따르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집집마다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한 형식을 취한다. 즉 예의를 표하기 위한 절적 한 형식이 의례이다.
조선 시대는 의례에 목숨을 걸었던 시기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수많은 서원이 증명하고 남인, 서인 등으로 파를 나눈 것도 따지면 형식에 관한 이견 때문이었다. 이는 곧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형태로 들어났다. 비약하면 관혼상제(관례, 혼례, 상례, 제례)의 복잡한 절차와 과도한 형식을 따르게 하는 병폐를 낳았다.
인간의 일생에 관혼상제보다 더 중요한 일은 별로 없다. 성인이 되고, 결혼하고, 죽어서 치르는 장례 그리고 하늘에 예를 갖추는 형식인 제사는 당연히 엄격한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차이는 있지만 동서양이 비슷하다. 리차드 세넷은 바로 이 관혼상제 즉 의례를 통해 어떻게 협동이라는 것을 인간이 하게 되는지 그것을 이책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동양에 있는 한국이라는 지형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감흥은 없지만, 이런 의례를 통해 협동과 협력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그것이 부족을 마을을 민족을 유지시키고 있는지를 세세히 연구한 책이 바로 투게더이다. 의례를 통한 협력을 생성하는 것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이므로, 의례는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세넷은 의례와 비슷한 수단으로 놀이와 정치(Pleasure And Politics)를 놓는다. 의례는 엄격한 형식을 수행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절제하며 내면으로 쌓이게 한다. 이를 반복하면서 사회적 질서를 만드는 반면 놀이는 인간의 감정을 분출하게 한다.
의례와 거의 상반된 형태를 가지지만 그 결과는 비슷하게 드라난다. 즉 공공체 의식을 형성하고 확대하는 것에는 놀이만 한 것이 없다. 여기에는 축제와 공연 등등이 있지만 가장 쉽게 말하면 스포츠가 여기에 속한다.
요즘 말 많은 한국축구를 생각하면 쉽다. 축구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이들도 월드컵에는 열광한다. 하나로 모으는 힘이 그 어느 놀이보다 강력한 것이다. 정치는 건너뛴다.
결국 리차드 세넷은 인간의 모여 살면서 공동체로 형성하기 위한 공동의식을 만드는 수단인 의례와 놀이 정치를 통한 사회현상을 뒤돌아보고 보다 낳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바로 투게더라는 책이다. 그러면 왜 협력 Cooperation이 아니고 함께 Together라고 했을까?
협력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둘 이상이 모여야 협력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도 따로따로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 그러니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즉 함께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투게더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긴 하지만, 결국 리차드 세넷의 투게더는 함께 Together 아니라 협력 Cooperation에 관한 이야기이다.
경기도자비엔날레에서 등장시킨 몽테뉴 고양이는 리차드 세넷 <투거더> 마지막 즉 에필로그(coda)에 해당하는 곳에서 등장한다. 몽테뉴의 간단한 일대기와 수상록(에세 essai)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면 왜 리차드 세넷이 몽테뉴 고양이를 언급하고 있는지 짐작해 보자.
몽테뉴 고양이는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When I am playing with my cat, How do I know she is not playing with me?)라는 말을 한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서양 철학자들이 많이 언급한 이야기이다. 이 부분을 조금 의역하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솔 프램튼Saul Frampton의 책(2012년에 발간 책의 제목이 위 영문 그대로이다) 번역본 제목이다.)
몽테뉴 고양이에서 방법론적 회의론과 타자에 대한 상대론, 존재의 근원을 물질에 찾는 사상 등을 언급한 철학자와 저술이 많다. 그만큼 몽테뉴의 고양이는 서양 철학자에게 영감을 준 문구이다.
그런데 여타 철학자와 달리, 리차드 세넷은 "우리가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협력하는 이유이다."라고 코다 부분에서 설명한다. 즉 서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해서 싸우고 외면하면서 협력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여기 저 유명한 홀바인 (Hans Holbein, 1497~1543)의 대사(Ambassadors)를 언급한다. 비록 여기에 나오는 대화는 실패하지만 협력을 강조하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간략하게 리차드 세넷의 투게더를 살펴보았다. 이제 경기도자비엔날로 눈을 돌려보자.
2024경기도자비엔날레
도자비엔날레 주제로 투게더-몽테뉴의 고양이(Together-Montaigne's Cat)를 선택한 이유를 여전히 잘 모르겠다. 고백하지만, 감독이 작성한 전시에 관한 글을 아직 읽지 못했고, 다만 리플릿에 소개된 몇 문장만 본 탓이다. 하지만 전시를 보고 이 주제와 관련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먼저 투게더 Together 함께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면 어떻게 도자비엔날레와 연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무엇이 함께 일까? 협력하고 공동체 의식으로 뭉치기 위해 함께라는 것은 알겠지만, 도자라는 장르에서. 혹시 흙과 불과 공기가 함께 만드는 예술 뭐 이런 의미일까?
흙과 불과 공기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만 도자가 된다. 그래서 함께라는 주제를 떠올린 것일까. 하여튼 더 이상 개인적 능력 한계로 해석이 나아가지 않는다.
몽테뉴 고양이는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서로 협력해야 한다."라는 투게더 코다의 문장을 아무리 해석해 봐도 이해를 못해서 협력이 안 된다. 리차드 세넷은 이해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저명한 학자의 생각에 딴지를 거는 능력도 안 되지만, 짧은 지식을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리차드 세넷의 몽테뉴 고양이는 자신의 학식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오히려 몽테뉴의 고양이 이야기에서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존재론에 관한 해석, 몽테뉴는 데카르트보다 한참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더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여기에 이르면 투게더라는 자신의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일환으로 2번 째로 저술한 투게더에서 어쩌면 사족일지 모르겠다. 사실 코다(coda)는 책 내용과 달리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경향이 많으므로.
자, 그래서 도자비엔날레에 몽테뉴 고양이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더욱이 놀이와 의례의 방식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화합을 도모한다는 주장은 헛된 주장이 되었다. 전시장에 나열된 작품에서는 의례도 놀이도 찾아볼 수 없고 더욱이 함께라는 주제를 떠 올릴만한 어떤 근거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부산, 광주비엔날레 그리고 여타 비엔날레서 내세우는 주제를 전시장에서 찾아내기 쉽지 않다. 여타의 반론이나 이론이 많겠지만 나이브하게 생각하면 그렇다.
여하튼 주제에 관하여서는 무언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아쉬운 비엔날레였다. 이런 감정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이다.
전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다시 언급한다.)
파트 1 세계와 함께: 순환하는 대지의 질서
파트 2 타자와 함께: 우정에 대하여
파트 3 자신과 함께 디지털 세상 속에서
여기서부터는 투게더와 몽테뉴 고양이와 완전히 관계가 멀어진다. 의례도 놀이도 특히 정치학도 없다. 리차드 세넷이 말하는 '함께'는 '협력'을 전제로 하는 용어이다. 전시 작품에서 협력에 관한 혹은 함께에 관한 어떤 연관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다만 여타 현대미술에 말하는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만든 온갖 문제들의 모음집 같은 인상이다. 따라서 작품 하나하나는 나름 감상의 가치는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하나의 일관된 주제 속에서 녹아든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욱이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비앤날레 다운 규모 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조금 규모가 있는 도자전시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러 모로 아쉬운 비엔날레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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