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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를 주류로 만든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우키요에 작가 5

by !))*!))* 2025. 4. 12.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는 일본에 가장 많이 알려진 우키요에 중에 <도카이도 53차>(東海道五十三次, 동해도 53차)를 제작한 화가이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에도 사람들에게 여행 붐을 일으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인기는 일본 국내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유럽 미술계에 자포니즘을 유포하는 계기가 된다. 우카가와 히로시게 작품은 세계 미술사에서도 다루어질 정도이다. 가장 극적인 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우카가와 히로시게 우키요에를 좋아 습작을 그림을 모방하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배경에 그려 넣기도 했을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생애와 그림 공부

히로시게는 에도 성의  정화소(定火消, 일본 근대의 소방조직, 주로 무사 저택의 소화를 맡았다)의 말단 직원인 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번 이름을 바꾸어 혼동되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히로시게가 13살 되던 해에 2월에 어머니가, 12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위로 누나 두 아래로 여동생 둘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히로시게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정화소 직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으로 부업을 하여 가난한 하급 관리로서 가족을 건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하급 관리에게는 흔한 일이기도 했다. 

 

1811년, 15살 무렵 히로시게는 정식으로 우키요에를 배우고자 당시 미인화와 배우 그림으로 유명한 우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国)에 입문을 희망하여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으나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던 토요쿠니에게는 거절당했다. 그러나 히로시게는 실망하지 않고 고서점 주인의 소개로 우타가와 토요쿠니의 제제자였던  우타가와 토요히로(歌川豊広)에게 요청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나 워낙 필사적으로 부탁하는 바람에 입문을 허락받아 드디어 우타가와 토요히로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 이로 인해 그의 이름(그림에 쓰는 이름)이 탄생하게 되는데, 스승 이름 히로시(豊広)의 마지막 글자, 와 자신의 이름인  시게오몬(重右衛門)에서 시게를 합하여 히로시게(広重)의 이름을 만들었다. 이는 당연히 스승이 만들어 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스승 우타가와 토요히로를 만나다

우타가와 토요히로는 우타가와 토요쿠니의 화려한 배우 그림으로 유명한 것과 달리  매우 수수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고 해서 활약이 미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명한 작가의 책 삽화를 많이 제작하였고, 미인화와 풍경화에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있어 제자인 히로시게에게 계승되고 있다.     

우타가와 토요히로, 에도 팔경 중에 돌아오는 배 츠쿠다, 1802~1829년 사이, 목판화, 24.7×37.2cm,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

 

히로시게가 당초 입문을 원했던 토요쿠니에게 배우지 않고, 대신 입문한 토요히로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결국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더, 조용하고 온화한 스승의 작품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미인화나 명소 그림으로 승화시켜 성공했기 때문이다. 히로시게가 토요히로에 입문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토요쿠니에게 입문한  인물이 있는데, 그가 사촌제자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이다. 

 

히로시게와 쿠니요시는 입문시기가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하다. 그러나 작풍은 매우 대비되어 서정적인 히로시게와 거칠고 기세가 뛰어난 쿠니요시는 서로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가 되었다. 

통속수호전호걸108인 중 한사람(通水滸伝豪傑百八人之一個), 니시키에, 37.8×25.8cm,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직장 상사인 오카시마 린사이에게 카노파 그림을 배우다

정화소의 말단 관리인 히로시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 있었다. 그것은 직장에 동료이자 그림의 스승인 오카시마 린사이(岡嶋林斎)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가르침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카노파의 화사로 있었던 린사이에게 그림을 배울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카노파(狩野派)

15세기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 회화양식의 주류였던 유파이다. 중국풍의 수묵화를 제작하면서 동시에

귀족의 성을 장식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통을 반영한 대형 병풍을 제작하였다.

막부의 지지를 받은 가노파는 막부 그림에 관한 수요를 거의 독점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사대부의 문인화 전통을 따랐지만, 그들은 가문의 공방에서 공식적인 수업을 받은 작가들이었다.

 

이외에도 히로시게는 여러 화파에게서 전통적인 화법을 배웠다. 한편으로는 당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서양의 원근법과 입체적인 화면과 구도를 독학하여 스스로 자신만의 화법을 창조해 나갔다. 

 

 

 

1831년 히로시게의 출세작 도우도 메이쇼(東都名所)를 제작

1819년 정화소에서 승진하고, 21년에는 관공서 동료의 딸과 결혼했다. 이 일로 장교가 된 그는 정화소에 계속 다닐까 고민도 했지만 서서히 화가의 길을 걸으려 준비한다. 29년에 스승인 가가와 토요히로가 세상을 떠나자 후계자로 추대되었지만 스스로 거절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자신만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831년 히로시게는 도우도 메이쇼(東都名所)를 발표하는데 35세 때였다. 히가시도는 에도와 가까운 근교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즉 교토의 동쪽인 에도의 근교를 선명한 색채와 감각으로 제작한 것으로 10경에 그친 것이지만, 큰 인기를 받아 화가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도우도 메이쇼 중 요시하라 나카노마치의 밤 벗꽃, 1831, 니시키에, 동경박물관 소장

 

현재도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히로시게의 작품의 원점이 되는 작품으로 그 특징에 하나는 전경과 후경이 대배되는 구도이다. 또 하나는 히로시게의 파랑이라는 베로 아이(베를린 블루,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남색)를 사용하여 하늘이나 물, 공기와 빛의 표현이 아주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요시하라 나카노마치의 밤 벚꽃은 중앙의 건물은 정확히 2점 투시도법인 원근법으로 그려져 있어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 빛나는 큰 달과 달빛에 비춘  밤 벚꽃은 아름답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활력 있게 보인다. 여기에는 많은 기법이 사용되어 있는 서양화의 원근법과 투시도법 그리고 현실적인 인물, 꽃과 밤 풍경이 그동안 쌓았던 경험과 기술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도우도 메이쇼 그린 다음 해인 1832년 정화소를 그만두고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이후 34년(혹은 33년이라는 설도 있다) 도카이도 53차를 발표한다. 

 

도카이도 53차(東海道五十三次, 동해도 53경)

이것은 도카이도(동해도로)에 있는 53개(일본교와 교토의 삼조대교를 더해 55 장)의 의 숙소를 그린 것으로 우키요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의 시대부터 그려온 전통적인 소재이기는 하지만, 배우나 미인도가 우키요에의 주된 소재였기에 비주류로 치부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로시개의 '도카이도 53차' 발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된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토미타케 36경'(富嶽三十六景)의 히트에 의해 풍경판화를 즐기는 개념을 제공하여 드디어 에도 사람들은 우키요에를 즐기는 또 하난의 방법을 제공하게 된다.

 

이렇게 알려진 도카이도 53차는 히로시게의 대표작이 되었고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에는 여러 특징이 있지만 무엇보다 풍경과 함께 거기에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도로 절경과 함께 여행자와 비구니, 유녀 그리고 이세(伊勢)를 참배하는 여행자 등을 그려 넣었다. 실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더욱이,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그대로 판화에 담아내 각 역의 풍물을 그려 넣었다. 이런 히로시게의 작풍은 그림을 유머스럽게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도카이도 53차 중 1차, 니혼바시(일본교) 행렬 진출, 니시키에
도카이도 53차 중 46차, 쇼노(현재의 미에현 스즈카시)의 소낙비, 니시키에,

<도카이도 53차>(東海道五十三次, 동해도 53차)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천하통일을 하고 전국의 도로를 정비하여 1601년에 도카이도에 전마 제도(伝馬制度, 우리식으로는 역마제도이다)를 시행한다. 도카이도는 에도에서 오사카까지 이른 동해에 닿은 도로로 53개의 역을 두고 숙식과 말을 바꿀 수 있는 여관을 둔 것을 말한다. 그래서 1차에서 출발하여 2차에서 말을 바꾸고 다음에 3차, 마지막 53차가 되면 오사카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끝에 순서를 나타내는 '차(次)'가 붙은 것이다.   

 

1831년 히로시게의 도우도 메이쇼와 호쿠사이의 토미타케 36 경이 발표되어 우키요에의 주류가 아니었던 풍경화를 두 명의 천재화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만들었다. 이 둘의 대결은 호쿠사이의 승리로 여겨졌으나 히로시게가 정화소 일을 그만두고 그림제작에만 매달리면서 맹추격을 하게 된다. 이 둘의 그림은 아주 대비되었다. 호쿠사이는 힘이 넘치고 화려하면서 기발한 구도를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히로시게 작품은 정확한 원근법과 투시법을 사용하여 매우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호쿠사이는 토미타게 36경 이후에 제국 폭포 방문기(諸国滝廻り), 제국유명다리관람(諸国名橋奇覧) 등 명소 그림 시리즈를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를 그만둔다. 히로시게도 판원의 주문에 따라 도카이도 53차에 관한 다른 버전으로 예서 도카이도 행서 도카이도 등을 제작한다. 또, 인물 도카이도, 1장에 여러 명소가 들어가는 장교 도카이도(張交東海道) 등 취향에 따라 제작 발표한다.  이에 히로시게 하면 명소 그림, 명소 그림하면 히로시게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에도에 여행 붐에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없는 에도시대라고 해도 당시에는 서민에게 여행의 ㅈ자는 없었다. 각 번주가 다스리는 지역을 자유롭게 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이유 즉 병 치료를 ㄹ위해 온천을 간다거나 순례를 목적으로 여행하는 인정되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여행 가이드 북이 출판될 정도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로시게가 도카이도를 제작하기 위해 정말 에도에서 오사카까지 여행했는지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다. 갔다는 설도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전체를 모두 방문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 정설로 드러나고 있다. 일부 지역을 방문하여 스케치한 자료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가지 않았던 곳은 다른 이의 그림이나 여러 자료를 통해 자신의 풍경을 창작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화조도와 육필화에도 재주를 발휘하다.

화조도는 야생화와 새나 짐승이 포함된 풍경화를 말한다. 히로시게의 화조도는 아주 사실적으로 이것을 그렸다. 그래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장르였지만 히로시게는 이 장르를 일반인 사랑하는 주제로 성장시켰다. 생선 만들기(魚づくし)는 히로시게의 화조도 중에서 대표적인 시리즈이다. 그중에서 새끼 돌돔, 쥐노래미, 남천(しま鯛、あいなめに南天)은 식재료 돌돔과 쥐노래미 그리고 남천이라는 붉은 열매를 단 가지를 그려 마치 해산물 카탈로그와 비슷하다.  풍자와 익살을 주로 하는 단가연합(狂歌連)의 의뢰로 제작된 화집이었지만, 인기가 있자 1장짜리 니시키에로 제작되었다. 

 

새끼 돌돔, 쥐노래미, 남천(しま鯛、あいなめに南天), 1830~44, 25.8×35.8cm, 海の見える杜美術館 소장

이런 화조도는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 마루야마 시조파(円山・四条派)의 영향으로 그들에게 히로시게가 배운 것이 틀림없다. 달과 기러기는 히로시게의 화조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3마리 기러기가 과감하게 자른 달을 배경을 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1949년에 우표로도 발행되었던 작품이다. 

달과 기러기(月に雁), 37.5×13cm, 니시키에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년에 남긴 대작 명소 에도 백경(名所江戸百景)

도카이도를 그려 출세작이 되었고, 다이묘 가문에게 수주를 받을 정도로 대가가 된 히로시게의 말년 작품은 에도의 명소를 그린 작품이다. 그는 마지막가지 에도의 풍경을 그리는 것을 고집했다. 화가로서 총결산이라고 해도 될 에도의 백경이다.  

 

상단 왼쪽에 있는 그림은 큰 다리 아타케의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 로 고흐가 모사한 유명한 판화 작품이다. 백경 중에서 여름 부분으로 52경에 속한다. 비를 직선으로 표현한 것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고,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행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은 스이도바시 스루가다이(水道橋駿河台)로 현재 죠타구의 북부지역을 가리키는 곳이다. 이곳은 높은 언덕으로 강이 잘 보이는 위치이다. 1857년에 제작한 것으로 여름 부분의 64경에 속한다. 남자아이의 건강을 기원하여 단옷날에 천이나 종이로 만든 잉어 깃발을 긴 장대에 매단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과감한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큰 다리 아타케의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 스이도바시 스루가다이(水道橋駿河台)
후까가와 스사끼 십만평( 深川 州崎 十万坪) 다이고바시의 언덕(目黒太鼓橋 夕日の岡)

하단의 왼쪽은, 후까가와 스사키 십만평(深川州崎十万坪)은 겨울 부분으로 108경에 속하는 그림은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 에도의 매립지인 후까가와 풍경을 보는 장면이다. 공중 촬영을 알지도 못했던 그가 이런 장대한 스케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른쪽은 메구로 다이고바시의 언덕(目黒太鼓橋夕日の岡)로  메구로 강의 다이고바시(대교)를 건너는 행인을 그린 것으로 겨울 부분에 해당한다. 에도 배경 중 112경에 속한다. 저녁 무렵에 눈을 피하려 우사을 쓰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걷는 행인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늘에는 많은 별들이 떠 있어 눈이 오는 장면과 맞지는 않지만, 강물과 같은 색을 사용하여 보다 생동감을 자아내고 있다.  

 

총 118장으로 히로시게가 185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2년 만에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가 얼마나 에도 풍경을 열정적으로 남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전 히로시게 작품에 관한 글을 썼었다. 히로시게에 대한 관심있는 분은 이 글도 읽어 보시길...

 

눈오는 밤에 갑자기 떠오른 히로시게의 우끼요에(浮世繪)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다색 목판화 우끼요에(浮世繪) 3대 작가 중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가 있다. 일본의 명소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당시 일어났던 여행 붐과 맞물려 큰 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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