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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색 목판화를 완성시킨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우키요에 작가 (3)

by !))*!))* 2025. 2. 16.

우키요에라고 하면  다색판화인 니시키에(錦絵)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다색판화인 니시키에는 우키요에의 발전에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유럽에 일본 판화를 알리며 일본문화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일본문화의 중심에 하나인 우키요에의 니시키에를 발전시킨 작가는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1725 ~ 1770)이다. 그는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고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일본을 제외한 나라에서 수집되었다.   

 

 

 

 

스즈키 하루노부 생애와 우키요에 제작기법

스즈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그다지 없다. 1725(1974년이라는 설도 있다)에 태어나 1770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니시키에는 1765년에 처음 제작 발표한 것으로 파악하면 전성기는 약 5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발표한 작품량은 엄청나다. 그 이유는 우키요에를 분업화시켜 말 그대로 판화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냈기 때문이다. 

 

하루노부는 교토에서 태어나, 니시가와 스케노부(西川祐信, 1671~ 1750)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후 에도로 이사하여 이웃인 히라가 겐나이와 깊은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겐나이는 난학에 관심이 많고 여러 기술에도 해박해 우키요에 판화 제작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하루노부와 겐나이는 함께 제작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키무라 모무오(木村黙老), 히라가 겐나이의 초상, 일본 게이오대학 소장

 

히라가 겐나이(賀源內, 1728~1779)는 에도시대에 유학과 본초학, 의학 등 다양한 방면을 탐구했던 이로 특히 네덜란드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히라가 겐나이는 다카마쓰 번의 하급무사 계급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유학과 본초학을 배웠고, 약용으로 쓰이는 동식물과 광물을 전시하고 많은 지식을 교류하려 했다.

 

겐나이는 네덜란드 상인과 교류를 통해 서양문물 연구에 열성이었지만, 1779년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병사하여 생을 마감했다.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1728~1779), 히라가 겐나이의 초상, 키무라 모무오(木村黙老), 일본 게이오대학 소장

 

 

하루노부의 어린 시절과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가 사망할 당시 나이도 46세였으며 다른 우키요에 작가들과 달리 자신의 본명으로 활동했다.  히라가 겐나이와 니시키에(錦絵) 기술 연구하기 이전에는 베니즈리에( 紅摺絵) 기법으로 우키요에를 제작했다. 여기서 간단하게 우키요에 종류를 알아보자. 

 

 

우키요에 종류

우키요에는 목판에 칼로 그림을 새긴 뒤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종이를 대고 문질러 제작하는 목판화이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 이전부터 책의 삽화제작에 이용한 방법이었지만, 책의 출판이 늘어나자 삽화 제작 방법도 발전하였고, 우키요에라는 독립된 예술장르로 발전하게 된다.  

 

스미즈리에(墨摺絵) : 먹 1도(색)로 제작된 것으로 검은 선과 면으로 구성된 목판화. 책의 삽화로 시작되었다. 책 절반에는 글을 넣고 나머지 절반은 그림으로 제작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림에 비중을 더 많이 두는 책도 등장한다. 한 장 전체에 그림이 들어가는 책들이 많아지자 먹으로 선을 그리고 붓으로 색을 덧칠한 것들이 나타난다.

 

단에(丹絵) : 먹 1도로 찍은 뒤, 납을 산화시켜 만든 붉은색을 붓으로 칠한 그림. 주로 가부키 배우의 얼굴이나 연기 모습이 많다. 점차 황색이나 녹색을 칠한 것도 나타난다. 

 

우루시에(漆絵) : 먹에 아교를 섞어 채색한 것으로 색이 마르면 광택이 난다.

 

베니에(紅絵) :  녹색과 황색 등 여러 색을 조합하여 더하여 칠한 것. 손으로 즉 육필로 가미한 것들을 말한다.

 

베니즈리에(紅摺絵) : 색깔 별로 2~3장 판목(그림을 조각한 나무판)을 만들어 2~3가지 색을 한 장에 표현한 것. 정교하게 색을 찍기 위해서는  판목에 겐토우(見当法)라는 기준이 되는 표식을 만들어야 한다. 정교하게 찍기 위해서는 판목의 크기와 판목에 표시하는 겐토우가 일정한 위치에 있어야 하고, 당연히 종이도 일정한 크기이어야 한다. 또 여러 색을 찍기 위해서는 종이도 튼튼해야 한다. 이런 여러 사항들이 갖추어져야 다색판화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니시키에(錦絵) : 2~3장의 판목으로 찍는 베니즈리에보다 한층 더 많은 판목(10장)으로 찍기에 더욱 정밀한 색채 표현이 가능한 것이 니시키에다. 한자로 '니시키= (비단 금)'을 사용한 것은 비단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니시키에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74년 경이고, 이것을 처음 사용한 하여 유명하게 된 작가가 스즈키 하루노부라고 알려져 있다.  하루노부가 처음 이 기술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부분도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우키요에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부유한 계층의 호사스러운 취미와 경쟁 때문이다. 즉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투자 즉 돈이 투입되었고 이를 즐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한 니시키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에고요미() 교환회' 즉, 부유계층들 사이에서 그림달력을 만들어 서로 선물로 교환하는 풍습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유한 상인들이 주요 수요자였다. 

 

에고요미는 태음력을 사용하는 달에 30일이 있는 큰 달과 29일로 된 작은달이 번갈아 있는데, 달의 크고 작은 순서가 해마다 달라졌다. 이를 이용해 우키요에라는 판화로 수수께끼처럼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제작하고, 재료는 더 화려하고 고급하게 만들어 교환했다. 서로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에코요미가 이용된 것이다.

이에 우키요에 제작자와 작가들은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궁리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우키요에를 발전시키는 주요한 이유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고요미는 스즈키 하루노부의 작품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곧 평정되었고, 이 판권을 영세업자들이 사들여 싸게 대량생산하여 서민들도 즐기게 하였다. 결국 이는 우키요에가 에도 시민의 중요한 문화와 오락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중용한 요인이다.

 

 

우키요에 제작팀 구성

여러 과정을 거쳐 다색판화로까지 발전한 니시키에는 우키요에와 동일한 용어로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니시키에로 등장한 시기부터 우키요에는 팀으로 구성되어 기획, 제작, 유통, 판매, 소비하기에 이르렀다.

 

작가를 섭외하는 일부터 판매까지 심지어 제작비가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기획자 한모토(版元), 판목을 새기고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우키요에시(浮世絵師)라고 한다.

우키요에시를 다시 세분하면 밑그림을 그리는 에시(絵師), 밑그림을 목판에 새기는 호리시(掘師), 물감으로 찍는 스리시(摺師)로 완벽히 분업화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모토가 팀을 구성하고 어떤 내용으로 판화를 만들 것인지 결정되었으면 가장 먼저 에시(絵師)가 단색으로 밑그림을 그린다. 이 밑그림을 한시타에(版下絵)하는데,  호리시(掘師) 이 그림을 풀로 판목에 뒤집어서 붙인다. 한지의 구조상 여러 겹으로 된 점을 이용해 손으로 종이를 살살 벗겨내, 밑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한다. 이를 호리시가 검은 선 즉 윤곽선만 두고 나머지는 파내서 기준이 되는 판목을 제작한다. 이 판을 오 모 한(主版)이라고 하는데 우키요에 제작공정에서 기준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밑그림은 사라진다. 기준판인 오모판(主版)으로 열 장 남짓하게 찍어 낸다. 이를 교고즈리(校合摺絵)라고 하는데 에시가 여기에 세부적인 그림을 그려 넣는다.  즉 판목을 찍을 순서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여기까지 과정이 진행되면 기본단계가 끝난다.

  

하지만 기준판인 오모판을 만들고 이후의 과정에 대하여 호리시와 스리시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그림을 그린다. 판화의 정교함을 사려내기 위해서는 판을 섬세하게 파내어야 하고, 종이에 찍는 기술도 아주 중요했기에 의견을 충분히 교환해야만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작가인 에시만 이름이 남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유는 아무래도 작가의 개성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즈키 하루노부의 니시키에(錦絵) 작품들

니시키에 탄생에 기여했다고 하는 스즈키 하루노부의 작품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시카고미술관 소장품인 <여름 소나기>(夕立図)이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 春信), 여름 소나기(夕立図), 1765, 니시키에(錦絵), 28.8×21.7cm, 시카고미술관 소장

 

부유층에서 달력 교환을 위해 제작된 작품(에고요미 )으로 유명한 것은 시카고미술관 소장품인 <여름 소나기> (夕立図)이다. 니시키에로 제작된 거의 최초 작품으로 언급되는 작품으로 스즈키 하루노부의 전형적인 작품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름 오후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  대나무로 만든 빨랫줄에 널린 옷(유카타)을 걷으려는 여성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지금 눈으로도 손색없는 회화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노부의 전형적 조형요소는 무엇보다 상부에 있는 구름 형태이다. 이런 요소는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나기가 내리는 각도와 여인이 쥐고 있는 장대의 각도가 일치하고 있는 점 등 하루노부의 회화적 요소를 볼 수 있다. 화면에서 재미난 구성은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신발이 벗겨져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에고요미로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빨랫줄에 널린 옷에 그려진 무늬들은 30일로 구성된 달을 표시하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또 오른쪽 하단에  에시(絵師),  호리시(掘師), 스리시(摺師)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한자는 조금 다르게 쓰여 있는데  화공( 工), 조공(彫工)이다. 에시와 호리시와 같은 뜻이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 春信), 눈 빛으로 글 읽는 유녀(見立孫康(雪立孫康)), 1765, 니시키에(錦絵), 28.3×29cm, 보스턴미술관 소장

 

 

사자성어인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형설지공은 개똥벌레의 불빛으로 공부한 차윤(車胤)의 고사와 눈 빛으로 공부한 손강(孫康)의 고사가 합해져 만들어진 성어이다. 하루노부의 이 작품은 눈 빛으로 글을 읽는 유녀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에고요미 즉 교환용 달력으로 제작된 것으로, 유녀가 읽고 있는 편지에는  「小の月 むつき 卯の花月 文つき きくつき 霜ふり月 しわす」(큰 달과 작은달을 암시하는 글)라는 글이 쓰여있었다. 이 판목을 구입한 제작업체는 이 글을 지우고, 달력에서 사용한 색보다 더 짙은 색으로 바꾸어 보다 강한 인상을 주는 판화로 만들어 판매했다.

 

스즈끼 하루보부의 니시키에로 만든 우키요에는 현대의 눈으로 보아서 완벽하게 독립된 회화 장르로 판단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아니 오히려 스즈키 하루노부의 작품과 이후에 제작된 많은 작품이 유럽과 미국으로 유입되어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관이 소장용으로 수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요철기법으로 판화에서 흰색을 구현한 空摺(からずり) = 엠보싱 (embossing)

스즈키 하루노부(鈴木 春信), 塗り桶の暮節(누리오케에 내린 저녁 눈), 1766 경, 니시키에, 27×20.5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재료가 가진 바탕색을 그대로 활용하는 기법은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판화에서 종이가 가진 흰색으로 그대로 활용한 기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종이에 자체에 요철을 주어 마치 무늬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우키요에에서 1760년대에 활용한 기법이다.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엠보싱(embossing)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판화가 가진 특성상 흰색을 표현하기 어렵기도 하고 특히 입체감을 드러내기는 어렵지만, 아예 판목에 요철을 주어서 이를 종이에 대고 강하게 문질러 조각대로 요철을 표현하는 기법인 空摺(からずり)를 스즈키 하루노부가 이용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위 작품은 '미타테에(見立絵)'라고 하는 것으로 이미 유명한 고전이나 설화 혹은 사건을 패러디해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산수화에서 아름다운 8가지 자연풍경을 그린 것을'소상 8경'이라 하는데 이를 패러디하여 '다다미방 8경' (坐敷八景)이라는 작품 중에 하나이다.

 

제목은 누리오케에 내린 저녁 눈(塗り桶の暮節)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누리오케(塗り桶)는 명주 실을 말리기 위한 옻칠한 함지박 같은 것으로, 하얀 비단이 덮인 누리오케를 눈이 쌓인 풍경으로 비유하여 만든 작품이다. 여기서 보이는 흰색은 모두 요철로 표현된 것으로 벽지와 기모노의 무늬부터 누리오케를 덮은 명주실과 바닥에 놓인 실꾸러미 등 모두 '가라스리'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스즈키 하루노부는 이 가라스리 기법을 적극 활용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뛰어난 작품을 발표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스즈키 하루노부의 미인화

스즈키 하루노부는 다양한 소재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특히 미인도와 남녀 간의 사랑을 그려 크게 인기를 얻었다. ㅎ루노부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평회가 약 150년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남녀 모두 화려한 모습으로 그려졌고, 중국의 미인도에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즈키 하루노부의 대표작 중에 목판화에 채색을 한 책(彩色摺絵本)인 <青楼美人合>(세이로우비진아와세, 유곽미인모음)가 있다. 이 책은 에도의 유곽인 요시하라의 유녀 166명 모습을 한 사람씩 목판화로 인쇄하고, 판화에 색을 칠한 것이다. 여기서 하루노부는 다양한 색을 만들어 사용했기에 이후의 우키요에서는 이런 색을 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유녀만 그린 것이 아니라 이웃에 살고 있는 아는 이의 의 딸을 그리기도 했다. 에도 시내에서 소문난 미인을 그려서 그 소녀를 유명하게 만들기도 했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青楼美人合(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발행자 弘文館, 1910년대, 스미소니니언박물관 소장

 

그는 유녀만 그린 것이 아니라 이웃에 살고 있는 아는 이의 의 딸을 그리기도 했다. 에도 시내에서 소문난 미인을 그려서 그 소녀를 유명하게 하기도 했지만, 가장 유명한 미인도는 일본 고전인 와카()에서 착상한 미인 풍속화이다.

 

<風流四季哥仙>는 1월부터 12월까지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 모습을 그린 연작으로 그중에서 2월 작품이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월 작품은 <二月・水辺梅>으로 강가 핀 매화꽃을 연인이 감상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 상단에는 와가가 적혀있다. 어두운 밤에 매화 가지를 잡으려는 소년 옆에 턱을 손으로 괴고 소년을 바라보는 소녀를 그린 것으로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람을 기리는 주제로 제작한 것이다. 

 

일본의 미술사학자에 의하면 꽃가지를 잡는 장면은 장래를 약속한다는 의미가 있어, 이 그림에서는 사랑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風流四季哥仙 二月・水辺梅(사계절풍류노래집, 2월·강가의 매화), 1768~69, 니시키에(종이에 다색목판화), 28×20.4cm,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스크키 하루노부는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미인도와 풍속도 이외에도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남겼고,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일본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유수의 미술관에 수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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