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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전성기에서 쇠퇴기까지의 등장한 작가들 - 우키요에 5

by !))*!))* 2024. 12. 22.

 

 

에도 시대 중엽부터 시작된 우키요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니시키에 기법의 등장은 튼튼한 종이의 발명에 힘입었다. 여기에 에도의 상인들의 요구에 의해 다양한 장르가 등장했으며 특히 미인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에도시대 말기까지 우키에요에는 일반인에게까지 펴지게 되었다. 여기는 이 시대에 등장한 우키요에 작가들을 살펴보려 한다.  

 

에도 중기에 등장한 우키요에 작가들

우키요에는 막부가 에도에 들어선 지 150년이 흐른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1725~1770)가 부유층들 사이에 유행하던 그림달력 교환을 위한 수요에 응해서 목판을 조각하는 사람(彫師 조각하는 사람), 판화를 찍는 사람(摺師 인쇄하는 사람)의 협력으로 니시키에(錦繪)라고 부르는 10가지 이상의 다색판화를 고안했다. 다색판화를 찍으려면 여러 번 인쇄를 해야 하기에 튼튼한 종이가 필요했고 판화를 찍는 기술이 고도로 발단해야만 했다.  

 

아래 작품은 스즈키 하루노부의  아라도시묘진( 蟻通明神)으로 오사카에 있는 신사 이름이다. 이 그림은 한 젊은이가 비 오는 밤에 초롱을 들고 신사 앞을 지나는 장면이다. 다색판화로 제작하여 화면에 색상 표현이 다양하고 부드럽다. 화면 구성이 인위적인 느낌이 줄어들고 회화적으로 변하여, 하루노부의 회화적 감각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鈴木春信, 蟻通明神, 67×1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키요에 전성기를 만든 니시키에(錦繪)가 탄생한 것이 바로 1765년이다. 이전까지 우키요에 판화 형식에서 벗어나 전성기로 돌입하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스즈끼 하루노부는 토리이 키요미즈(鳥居淸滿), 니시카와 스게노부(西川祐信) 등의 화풍을 도입한 베니즈리에(紅摺繪)작가로 등장했지만, 니시키에(錦繪)의 창안을 계기로 새로운 미인 풍속화의 양식을 창안해 에도 시민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하루노부의 니시키에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중간색을 기조로 해서 색채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색채효과를 살리기 위해 화면구도나 색면(물체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색으로만 표현하는 방법으로 동양화에서 ‘몰골법’(沒骨法)이라고 부르는 방법과 같음) 매우 신경을 썼다. 또 그의 작품의 특색은 귀족 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모티브는 니시카와 스게노부(西川祐信)의 삽화의 계통을 이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취재한 미인 풍속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그림 대부분은 그림 속에 쓰인 일본 고전노래 속에 내용을 당시 풍속에 맞추어 바꾼 것으로 현실감은 희박하다.

 

鈴木春信, 외출준비, 보스턴미술관 소장

 

여인이 외출 준비를 도와주는 장면이다. 뒤에 장식창을 검은색으로 강하게 배치한 것이 두 연인을 집중하게 만드는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으며, 창틀에서도 부분적으로 몰골법을 사용해 입체감을 살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작품에서 즐겨 사용한 검게 칠한 배경은 작품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학과 회화와 결합으로부터 생겨난 일본 왕족의 그림을 몽상적 향기가 있는 친밀하고 부드러운 서민의 일상생활 속으로 이동시킨 것이 그의 인기 비결이었다.

 

하루노부의 미인도는 니시카와 스게노부(西川祐信)나 청나라 화가 구영(仇英)의 미인도 양식을 도입하였고, 미성숙한 소녀의 모습과 버들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허리를 가진 미인도로 당시 에도시민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하루노부 죽음으로 이러한 그의 화풍은 마침표를 찍고, 이후의 화가들은 새로운 화풍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을 맞이한다.

 

이소다 코류사이(磯田湖龍齋, 1735~1790), 키타오 시게마사北尾重政(1739~1820) 등은 하루노부 풍의 미인도 보다 현실적인 형태의 여성상을 그리게 되었다. 또 가부키 배우 그림에서는 토리이 키요노부(鳥居靑信) 이래 약속된 유형의 수법을 지속한 토리이(鳥居)파에 대해서 카쯔카와 슌쇼(勝川春章, 1726~1792)와 잇삐쯔 사이분죠(一筆齋文調, 생몰년대 미상)는 니시키에가 가진 다색판화의 특성을 살려 가부키 배우의 인상과 연기의 특징을 묘사하는 그림을 고안해 무대나 음악실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려 가부키 배우 그림에 일대 전환점을 부여하였다.

 

磯田湖龍齋, 내가 보이는 찻집에서 사미센을 연주하다, 39.4×49.4cm, Kimbell Art Museum 소장

 

이소다 코류사이(磯田湖龍齋, 1735~1790)의 <내가 보이는 찻집에서 사미센을 연주하다>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은 정교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두 여인은 물론이고 정교하게 표현한 발도 정교함이 넘쳐난다. 사미센을 연주하는 옆에 시녀가 가느다란 발을 들추자 직선으로 된 난간 사이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된 물결이 드러나는 장면이 매우 회화적이다. 에도 중기에 들어서면 우키요에는 점점 과정보다 사실적인 표현에 다가서게 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코류사이보다 이들보다 더욱 현실적인 배경을 한 화풍으로 미인도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낸 것은 토리이 키요나가(鳥居淸長, 1752~1815)이다. 키요나가의 미인도는 스승 토리이 키요미쯔(鳥居淸滿, 1735~1785), 이소다 쿄류사이(礒田湖龍齋, 1735~1790) 등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1781년경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켜 수년 후에는 우키요에의 화단을 풍미한 키요나가 풍의 미인도를 만들어 냈다.

 

키요나가의 미인도는 빈틈없는 눈썹, 긴장된 얼굴을 한 장신으로 팔등신 혹은 그 이상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 또 그의 니시키에는 이런 아름다운 전신상을 좌상과 결합해 2장, 혹은 3장을 연속해서 만든 화면에 기념비적인 군상 형식으로서 구성한 것이 많고 검은색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색조도 매력의 요소이다. 외부 풍경을 많이 그린 것도 특징에 하나이다.

 

鳥居淸長, 美南見十二候 七月 夜の送り(남쪽 열두 달 중 7월 밤에 배웅하다), 錦繪, 1784년경, 호놀룰루 미술관 소장

 

대형판으로 2장을 연속해서 그린 니키시에 제작법을 사용했다. 니키시에는 정교하게 판을 제작해 10판 이상을 제작하는 방법으로 자유로운 색채 표현이 가능했다. 토리이 키요나가의 미인도가 에도의 우키요에의 중심 주제의 하나인 미인도가 완성되었다고 하는 평가가 많다. 美南見十二候는 남쪽의 12달을 뜻하는 말이다. 그중에서 한 여름인 7월에 밤 풍경을 낭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키요나가의 미인도는 1781~1788이 전성기이고, 이 시기 이후에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1806)의 미인도로 옮겨간다. 우타마로(歌麿)는 처음에는 키이나가(淸長)와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의 스타일을 모방으로부터 출발했다. 1789~1801년(관정 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그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확립했다.

 

그의 새로운 양식은 ‘비진 오꾸비에’(美人大首繪)로 전신상에서 흉상이나 상반신상으로 변화되어 유녀의 표정이나 미모를 가까이 확대한 형식이다. 키요나가의 미인도가 주변 환경과 어울려 아름다운 자태나 의상의 아름다움에 주안을 둔 것에 비해서 우타마로의 비진 오꾸비에(美人大首繪)는 배경을 따듯한 운무나 황색의 단색으로 칠하여, 볼륨이나 색채를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화면구도를 관능적인 여성상이 드러나도록 하여, 미인의 심리와 개성까지 드러나도록 완벽히 묘사하는 것까지 성공하고 있다. ‘후진소우가쿠짓타이(婦人相學十體, 1792~1793)’, ‘카센코이노부(歌撰戀之部)’ 등은 1791년부터 17936년경에 걸쳐 그의 전성기 작품으로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喜多川歌麿, 婦人相學十體, 37.7×24.3cm, 美人大首繪, 1792~1793,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여인의 다양한 모습을 시리즈로 제작한 작품에 하나로 '비진 오꾸비에’(美人大首繪)라고 부른다. 이런 형식의 우키요에가 제작된 배경에는 에도 시민의 요구 즉 시장의 요구에 우키요에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여인의 얼굴을 보다 두드러지게 보이기 위해 배경에 운모가루를 바른 것을 볼 수 있다. 은색의 운모가루는 여인의 흰 피부를 더욱 강조해 에로틱한 감정이 들도록 의도했다.

 

카쯔카와 슌쇼(勝川春章, 17261792)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1806)가 활약했던 시기는 우키요에 중에서 미인도가 전성기에 해당하고, 그 외에도 많은 미인도 화가를 배출했다. 우타마로는 1804년에 발표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을 주제로 한 역사 그림이 막부의 노여움을 사 手鎖(손을 묶는)의 형을 받아 손을 다친 이후 1792년 경부터는 볼륨이 사라지고 요염한 여성을 표현하는 경향으로 변한다.

 

이후 막부에 의한 반세기 동안은 우키요에 양식의 종말기에 해당한다. 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國, 1769~1825)와 그의 제자 다수가 우키요에 화가로 있지만, 확대된 수요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우키요에의 특징은 형태가 붕괴되고 왜곡과 요염한 색조를 주로 한 미숙한 미의식, 당시의 기괴한 취미의 반영을 보여준다. 막부 말기의 우키요에는 이러한 요소에 점차 쇠퇴기의 예술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첨예한 미의식이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文化文政期(1804~1830)의 가가와 구니사다(歌川國貞, 1786~1865), 케이사이 에이센(渓斎英泉, 1791~1848)의 미인도가 가지는 아름다움과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國芳, 1798~1861) 등의 기괴한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상상력 등이 재평가받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우키요에의 유명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서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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