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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 그림으로 최고가 된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清信)- 우키요에 작가 (2)

by !))*!))* 2024. 12. 28.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清信, 1664~1729)는 에도에서 1600년대 떠오른 가부키(江戸歌舞伎)이라는 연극을 홍보하는 우키요에를 제작하면서 이름을 높인 작가이다.  특히 가부키 공연 중 무사나 귀신의 거친 행동을 과장해 연기하는 장면(荒事, あらごと)을 포착하여 가부키를 홍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도리이 키요노부로 시작된 도리이 가문은 현재까지 가부키 우키요에를 전속으로 그리고 있으며,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우키요에 그림에 새로운 소재로 가부키를 도입한 토리이 키요노부

 우키요에하면 가부키를 떠올릴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시킨 작가가 바로 토리이 키요노부이다. 가부키가 공연되는 극장 외벽에 걸 수 있는 간판그림이나 막부가 요구하는 그림 모두를 독점한 사람이 토리이 키요노부일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좌) 가부키좌 극장 좌우에 서있는 홍보판 그린 우키요에 우) 일본 동경 긴좌에 있는 가부키좌 극장

 

토리이 가문의 시조인 토리이 키요노부(鳥居 清信, 1664~1729)는  가부키 배우를 하다가 우키요에를 그리는 화사로 직업을 전환한 토리이 키요모토(鳥居清元)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이 등장한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우키요에 시조라고 불리는 히시가와 모로노부(菱川師宣)가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우키요에라는 이름이 아니라 야마토 그림(大和絵 : 일본 그림)으로 불리고 있었다.    

 

키요노부 아버지인 키요모토는 오사카에서 가부키 연극의 여자로 분장한 배우로 활동했었다.  여기서 가부키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자.

 

가부키는 여성이 신사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통속적인 춤을 춘 것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보다 연극적인 요소를 더하여 유녀들이 연기하였는데, 극 내용이 저속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 풍기문란하다는 이유로 막부가 1629년 여성 출연을 금지시킨다.
이에 가부키는 여성 대신에 앞머리를 아직 밀지 않은 어린 소년들을 여성으로 분장시켜 여성 연기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남색이 성행하고 무사들끼리 칼부림까지 일어나자
1652년 막부는 아예 가부키 연극을 완전히 금지한다.
하지만 가부키를 허가해 달라는 상인계급과 서민의 성원이 빗발치자
막부는 여성 역할을 남성이 하는 출연배우 모두 성인남자로 하고, 춤을 제외한 연극과 노래 만으로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가부키는 서민들을 위한 오락이기 때문에 내용이 저속한 경우가 많았지만,
막부가 금지할 때마다 자극적인 내용과 저급한 장면을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등
자정작업으로 스스로 작품성을 높여 나갔다. 
  

 

토리이 키요모토는 막부가 여성 출연을 금지하고 성인남자만 출연할 수 있었던 시기에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던 배우였다. 정확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지만, 여자 배우를 그만두고 대신 자신이 갖고 있던 재능인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것도 가부키 극장의 홍보를 위한 간판 그림과 요즘 말로 하면 가부키를 홍보하는 목판인쇄 광고물(番付 번부) 그림을 그리면서 가부키 연극세계에 머물게 된다.     

 

토리이 키요모토는 가족 모두를 이끌고 우리도 아는 오사카 도톤보리(마라톤 하는 남자 광고판이 있는 거리)에 있던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1687년 신흥도시로 떠오른 에도로 이사한다. 이때 아들 키요노부는 3살이었다. 에도로 이사 간 키요모토는 극장이 많은 난바초(지금 니혼바시 닌교초)에 거주한다. 그리고 3년 뒤인 1690년 그러니까 키요모토가 45세에 '이치무라좌'(市村座) 극장에 간판을 그려 호평을 받는다. 그때만 해도 에도에 있는 가부키 극장에는 간판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키요모토가 가부키 극에 나오는 배역을 그려서 간판으로 설치한 것이 큰 호평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당시 '이치무라좌' 극장은 에도의 3대 극장에 하나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극장 간판으로 이름이 알려지자 다른 곳에서도 간판을 의뢰받으면서 명실공히 에도의 간판화가로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그가 간판화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젊은 시절에 배우로 활동하면서 가부키에 대한 지식이 바탕이 되었다. 극적인 장면, 배우의 동작, 의상, 무대장치 등을 잘 알았기 때문에 홍보 효과 있는 부분을 잘 묘사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간판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의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토리이 키요노부는 아버지에게 가부키의 지식과 그림 그리는 기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업을 계승시키기 위해 교육을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시켰다. 그래서인지 키요노부는 다행히 재능을 발휘하여 아버지와 함께 가부키 간판과 인쇄광고물을 그렸다. 

 

어느덧 10년이나 간판 그림을 그린 뒤, 목판으로 책을 출판하는 사업이 성행하자 책의 삽화나 미인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키요노부의 초기작품인 1697년  仮名草子(에도 초기에 히라가나로 쓰인 소설류) <本朝二十四孝>(武田信玄 가문과上杉謙信 가문이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이야기 중에서 24장면을 그린 것)를 비롯해서, 1700년에는 <風流四方屏風>(가부키 연극에 나오는 배우 모음집), < 娼妓画牒>(창기화첩, 유녀를 그린 화첩)를 출판하여 자신의 그림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仮名草子 <本朝二十四孝>, 두 가문이 서로 대립하고 전투하는 소설에 삽입된 삽화, 1679년 간행
<風流四方屏風>, 가부키 연극 출연배우들의 모음집, 1700년 간행
<娼妓画牒> , 유곽의 유명한 유녀 모읍집, 1700년 간행

 

가부키 연극과 배우를 대중에게 홍보수단이 된 우키요에

키요노부가 어떻게 가부키 간판 이외에 삽화나 미인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직접 배우진 않았지만,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히시카와가 평생동안 책 삽화와 미인도 무사를 계속해서 그린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사제관계는 아니지만 히시카와 모로노부가 후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히시카와 모로노부 역시 가부키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도리이 키요노부만큼 유명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토리이 키요노부의 가부키에 관한 그림은 어떻게 유명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토리이 키요노부는 가부키 연극의 줄거리와 출연배우에 관한 지식이 많았다. 이는 가부키 배우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다. 키요노부 아버지인 키요모토는 그림만이 아니라, 가부키 연극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극적인 장면과 출연배우의 연기까지 세세하게 가르쳤다. 따라서 키요노부는 가부키에서 어떤 장면과 배우의 동작이 대중에게 인기 있을지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옮겨냈다.    

 

다음 작품은 스미소니언 국립박물관 소장품으로 도리이 키요노부가 18세기 초반에 가부키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위쪽 좌우에 가부키에서 역할하는 배우(개인 이름이 아니라 배역 이름) 이름인 市川八百藏(이치가와 야오죠) 瀬川菊之丞(세가와 기쿠노조)가 적혀있다.

도리이 키요노부, 市川八百藏와  瀬川菊之丞 , 18세기 초반, 20×17.5cm,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상단 좌우에 이름이 적혀있다.

 

가부키의 극적인 장면을 잘 포착하여, 두 배우의 격렬한 운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출판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출판 당시의 색보다 훨씬 흐려졌을 것이므로, 출판 당시 생동감 있는 색상을 감안하면 얼마나 가부키의 극적인 장면을 잘 표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키요노부가 가부키 그림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가부키를 잘 안다는 사실과 연결되는 것이긴 하지만, 연극 제목과 출연배우의 이름만으로도 어떤 장면이 그 연극에서 가장 극적으로 연출이 될지 알았다는 점이다. 연극 연출자에게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키요노부에게 홍보를 위한 간판 그림을 의뢰하면 누구보다 극적인 장면을 그려냈다. 그러니 당연히 가부키 극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카요노부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가부키 공연 중 무사나 귀신의 거친 행동을 과장해 연기하는 장면인 '아라고또'(荒事, あらごと)를 누구보다 잘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키요노부의 가부키에 대한 지식과 그림은 책을 출판하는 이들에게도 매우 큰 이득을 안기는 일이 되었다. 책을 출판하는 이들에게는 인기 있는 극장에서 인기배우의 그림을 제작하는 키요노부는 흥행보증 수표와 다름없었다. 명장면과 명대사를 기록하고 인기배우의 아라고또를 잘 그려낸 키요노부의 우키요에는 극장 운영주와 책 출판사업자를 서로 제휴하게 만들었다. 카요노부의 그림 한 장은 공연 전에 이미 제작되어 배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두 사업자에게는 큰 이점이 아닐 수 없었다.      

좌) 三条勘太郎(산조 칸타로) 市村竹之丞 (이찌무라 다케노조)  요시와라에서 한 쌍의 연인, 1720년경, 31.115.2cm, 목판화에 채색, 클리블랜드 소장 우) 오마에 쿠모이 역의 오노에 마츠노스케, 1720년경, 29.4×13cm, 목판화에 육필, 스미소니언 국립박물관 소장

 

 

토리이 키요노부의 미인도와 춘화

키요나가 역시 미인도와 춘화를 그렸다. 우키요에 창시자로 불리는 히시카와 모로노부에 비하면 기요노부의 미인도는 약간 풍만하고 키가 크게 보이게 그렸다. 얼굴도 둥글고 코를 크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춘화도 있지만 그렇게 널리 알려진 작품은 없다. 

 

토리이 키요노부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부 출판업자들은 우키요에 그림에서 가부키 배우 이름을 지우고 키요노부의 미인도로 속여서 판매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연기하는 가부키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위에서 소개한 가부키 배우 그림을 보면 남녀의 구분이 쉽지 않다. 특히 가부키라는 문화에 익숙하지 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렇다. 어쨌든 칼을 찾고 있으면 남자이고, 칼이 없으면 여장을 한 남자배우이지만 키요노부는 여장한 남자라는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렸다. 

 

즉, 진짜 여성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여장을 한 남자를 그린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려냈던 것이다. 따지면 감상자가 어떻게 볼 것인지 선택해야 할 정도이다. 

 

아래 작품은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으로 목판화가 아니라 육필로 그린 미인도이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의 얼굴이 풍만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녀와 두명의 시녀, 비단에 채색, 83.4×33.2cm, 1705년 경, 시카고 미술관 소장

 

토리이 키요노부를 시조로 해서 도리이 가문은 키요노부 2세도 우키요에 세계에서 활약하면서 이름을 더욱 알리게 된다. 우키요에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면서 더욱 다양하게 출판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7세기 중엽, 토리이 가문에서 혈조이 끊기면서 쇠퇴하는 듯하다가 토리이 키요나가(鳥居清長, 1752~1815) 가 등장하면서 도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더욱 세련되고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그림으로 그의 인기는 누구보다 높아지게 된다.  

 

토리이 가문과 토리이 키요나가에 대한 작품 소개는 다음 편에서 이어질 것이다. 아래 글에서는 도리이 가문에 대한 또 다른 글이다.  

 

 

우키요에 제작기술을 확장시킨 토리이(鳥居) - 우키요에 2

지난 편에서는 우키요에(浮世絵) 창시자로 불리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에 관해 간단히 알아보았고 이번에는  우키요에를 널리 보급하는데 기여한 토리이(鳥居) 가문 출신 작가

red-pig-1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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