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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보는 것이 쉽다고, 보면 안다고? - 그림을 사려면 갖추어야 할 자세 5

by !))*!))* 2024. 6. 24.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그림 보는 이들이 흔히 하는 행동은 그림을 쓱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데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서 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 눈은 정확하지 않기에 본다고 다 이해되거나, 알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눈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이미지가 지나는 통로일 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그림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양화, 동양화, 판화 이런 것말고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보는 그림, 읽는 그림, 이해하는 그림, 감동받는 그림이다. 이렇게 나눈 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법에 따른 것이다. 그림을 감상하는데 법을 딱히 나눈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아두면 헛 힘을 쓰지 않게 된다.

 

읽어야 할 그림을 쓱 보고 지나가면 당연히 못 본 것이 되고, 어렵다고 말하게 된다. 그냥 쉽게 보아도 될 그림을 이리저리 씨름하다가, 나중에는 주절주절 감당도 못할 감상을 늘어놓게 되는 일이 생긴다.

 

보려고 애만 쓰고,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일이 생겨서는 그림을 감상하는 의미가 없다.

 

이해하는 그림은 예술적인 면보다는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용해서 그렸는가를 읽어내야 한다. 많은 그림이 다양한 사회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그려졌다. 개인 중심이건,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혹은 일부 민족을 중심으로 했건 말이다.

 

최근 젊은 작가들은 이런 그림 아니, 정확하게는 이런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요즘 미술관이나 화랑에 걸린 그림이나 대부분의 설치라는 하는 것들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첨단 기기를 이용해서 만든 영상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그림 앞에서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도통 이해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마는 관람객이 수없이 많다.

 

감동받는 그림도 있다.

 

보고, 읽고, 이해하는 모든 과정을 거쳐 자신과 하나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가슴에서 무언가 뜨겁게 올라오게 만드는 그림이 있다. 그것을 명화라고 부르든, 그렇지 않든 아무런 상관없다. 남들은 미쳐보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지만, 나에게만은 그 그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감동받는 그림을 만나는 것이다.

 

감동받는 그림을 자주 만나고, 이런 관람객을 자주 만날 때, 미술은 무궁한 가능성을 가진 문화가 된다.

 

어쨌든 대부분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는 관람객은 그림을 보려고만 한다. 마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인 양 말이다. 우리의 눈은 믿을 것이 못된다. 눈은 사물을 곧이곧대로 뇌에 전달하지 않고, 뇌 역시 눈이 전달하는 모든 물체를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뇌는 관심이 가는 것만 인식한다. 눈도 물체가 생긴 그대로 뇌에 보내지 않는다. 눈은 크게 렌즈 구실을 하는 수정체와 필름구실을 하는 망막으로 되어있다. 이 수정체가 둥글게 되어있기 때문에 사물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항상 사물을 왜곡시킨다. 사실을 끝없이 맹신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지만 사실이다.

 

2. 눈은 이미지를 통과시키는 곳일 뿐이다. 

그림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은 일차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각예술인 그림은 사물을 곧이곧대로 만들거나, 그리면 오히려 우리는 또 다른 시각적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눈은 언제나 보이는 물체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착시라고 부른다.

 

이런 착시현상을 보완하기 위해 수천 년 전부터 미술은 여러 방법으로 대처해 왔다. 그 방법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고, 우리에게는 시각의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이미 아주 오랜 전부터 눈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눈이 사물을 왜곡시키는 착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을 지을 때 정확한 자와 줄을 가지고, 정성 들여 지어도 불안한 집이 되고 말았다. 물론 보기에 말이다. 아무리 맞추어도 처마가 밑으로 쳐진 듯이 보이고, 똑바로 올라간 기둥도 비스듬하게 보였다. 요즘 사각형 고층빌딩처럼 말이다. 시각적 고려 없이, 불안해 보이거나 말거나 그냥 하늘만 높은 줄만 알고 짓는 그런 건축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불안해 보이는 것을 불안해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을 오래전부터 연구한 것이다. 보이는 것을 다시 왜곡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렇게 왜곡한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다운 인류 문화유산을 만들었다.


특히 신을 모시는 집이 보기에 곧 무너질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나 두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각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과학적인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다.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수천 년의 세월을 지켜냈다. 너무 많이 파손되어  오래 전부터 복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최고의 관광지임은 분명하고 여전히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페리클레스’가 지시해서 기원전 447년에 시작해서 432년에 완공되었다. 설계와 감독은 페리클레스의 친구인 ‘피디아스’가 맡았다. 길이 69m, 폭 30m, 높이 10m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은 착시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크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테논 신전은 전혀 불안하게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고 아름답다고 자랑하고 있다. 훌륭한 조각이며 건축가였던 피디아스는 단순히 신을 모시는 신전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품으로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했다. 피디아스는 눈이 착각해서 일으키는 왜곡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답을 간단하게 말하면 정확한 수평과 수직아 아니라, 완만히 올라가거나, 내려간 곡선을 이용했다. 건물의 밑을 받치는 기단은 위로 솟은 완만한 곡선이 되게 쌓았다. 기둥도 가운데가 들어간 곡선으로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홈을 팠다.

 

기둥 배치도 완만하게 굽은 선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을 실측한 대로 그려보면 직선이 아니라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착시를 보정하기 위해 실재로 건축한 선모양

 

우리 눈이 곡선을 직선보다 더 직선처럼 보이게 하는 현상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피디아스만 이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만 사용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인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런 과학적 시각보정 방법이 이용된 건축물이다. 13세기 고려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는 무량수전은 파르테논 신전에 못지않은 과학과 기술이 숨어있는 부처님 집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책에서 배웠던 ‘배흘림’ 기둥이 바로 무량수전 기둥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은 기다란 직선을 가진 건축자재이다. 하지만 기다란 직선은 우리 눈을 착각시켜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기둥은 실재보다 얇아져 빈약한 기둥처럼 보인다. 육중한 지붕을 받쳐야 하는 기둥이 제 역할을 못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건축물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그 불안은 불길한 징조로 이어지게 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기둥의 가운데 부분을 두둑이 나온 배처럼 만드는 것이다. 배흘림기둥이 무량수전에 세워진 까닭이다.


또 기둥은 여러 개를 나란히 세울 때 시각적으로 상당한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즉, 정면에서 건축물을 바라보면 기둥은 밖으로 넘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가운데 기둥은 짧게 보인다.

 

이런 착각을 보정하기 위해 맨 가장자리에 있는 기둥을 안쪽으로 쏠리게 세운다. 기둥 굵기도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게 한다. 그리고 기둥의 키를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추녀 아래에 오는 기둥은 처마 아래에 오는 기둥보다 길게 만든다. 이렇게 기둥을 세우면 육중한 지붕도 기둥 위에 가뿐하게 올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3. 미술에서도 착시를 이용했다. 


눈에 보인다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보는 것은 누구나 똑같이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림의 역사에서 한 장면에 움직이는 모습을 그려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만화영화에서 한 동작을 움직이게 할 때 초당 24장 정도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24장을 한 장에 모두 그리는 방법을 시도한 화파가 있다. 1909년, ‘마리네티’(Filippo Tommaso Emilio Marinetti, 1878~1944)는 ‘미래파 선언’을 통해 과거의 전통을 벗어나 미래주의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 선언은 1910년 ‘미래주의 화가선언’으로 이어져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도시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기계문명과 빠르게 움직이는 속도감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힘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또, 이들은 그동안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도전했다. 아무도 아름다움이 속도, 힘, 움직임 등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미래주의 작가들은 이런 시도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그림을 창조해 냈다.

 

자코모 발라의 목주를 한 개의 역동성
자코모 발라, 목줄을 한 개의 역동성, 1912, , 90×110cm, 미국 뉴욕, 버팔로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소장


이런 사실을 모르고 미래주의 그림을 보면, 웬 강아지 꼬리가 이렇게 많나, 도대체 로봇을 만든 것인가 사람을 조각한 것인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들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보려고만 하는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많은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림을 눈으로 보는 행위는 이해를 위한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시작 단계일 뿐이다.

눈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를 자기 스스로가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뒤에야, 눈앞에 있는 그림 혹은 작품이 자신에게 이야기를 걸어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더라도 그저 산책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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