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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 제작기술을 확장시킨 토리이(鳥居) - 우키요에 2

by !))*!))* 2024. 12. 18.

 

지난 편에서는 우키요에(浮世絵) 창시자로 불리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에 관해 간단히 알아보았고 이번에는  우키요에를 널리 보급하는데 기여한 토리이(鳥居) 가문 출신 작가를 소개하려 한다. 이들은 서적 수요가 늘어나면서 우키요에 제작도 늘어나게 되었다. 토리이 가문은 대대로 우키요에를 제작해 유명해진 가문이다.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淸信), 서있는 여인(立ち美人図), 55.3×30.6cm, 17~18세기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토리이(鳥居) 가문의 토리이 키요노부

토리이 키요모토(鳥居淸元)와 그의 아들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淸信, 1664~1729) 그리고 키요노부와 부자인지 형제인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토리이 키요마스(鳥居淸倍, 미상) 이들이 토리이 가문의 작가들이다.  이들의 등장 이후 우키요에를 회화로 부를 수 있게 그 성격을 확립한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키요모토는 오사카에서 가부키 연극배우로 활동했었다. 하지만 막부에서 1629년 가부키에 여배우의 출연(과도한 성적인 표현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을 금지하면서 남서으로서 여배우 역할을 했지만, 이내 배우를 포기한다. 보통은 다른 직업을 찾았을 것이지만, 키요모토는 자신이 잘 알던 가부키 영역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아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능 즉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이용해 가부키 홍보를 위한 간판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17세기에 일본은 장사를 잘하기 위해서는 홍보를 알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상업이 발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어쨌든 키요모토는 그림 그리는 재주와 가부키 배우로 연극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기에 극장 간판을 그리는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할 수 있어 가부키 극장에 그대로 눌러앉을 수 있었다.

 

키요모토는 오사카 도톤보리에 있던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에도(동경) 난바초(현재 동경 주오구 니혼바시 닌교초)로 1687년 이사한다. 그는 가부키 배우였기에 가부키 연극에서 중요한 장면이나 배우의 의상, 무대 장치 등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장면이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고, 이를 실감 나게 그려냈다. 그의 이런 예상을 적중해 꽤 성공했다. 하지만, 간판이라는  속성 때문에 그가 그린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 그의 아들인 토리이 키요노부가 이 형식을 물려받아 발전시켰다.

 

아들인 도리이 키요노부가 그림 그리는 것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하고, 자신의 지식을 전달했고 아버지 제작 형식을 잘 따라 해 냈다. 또 그는 우키요에 창시자 불리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의 작품을 철저히 연구해 그의 기법과 화풍을 철저하게 습득했다.   

 

가부키는 두 가지 그림이 있다.  그 하나는 판 그림(看板絵), 또 하나는 번부 그림(番府絵 : 연극의 장면이나 상연되는 제목, 연출자 이름 등을 기재한 팸플릿, 포스터 같은 선전물용 인쇄물을 말한다.)이다. 간판은 현장에 다는 것이고, 번부그림은 배포용이라고 하면 딱 맞는다. 간판은 실제로 천이나 목판에 그리는 것이지만, 번부그림은 책에 넣는 즉 삽화그림인 것이다. 당시 에도의 신흥산업으로 번창하던 출판문화의 조류를 타면서 책에 넣는 여러 그림과 미인도 등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간파한 키요노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이것이 우키요에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리이 키요노부 (鳥居淸信 , 1664~1729) , 1697년 간행 本朝二四孝에 삽입된 판화

 

위 그림은 키요노부가 부모나 형제, 가족의 소중함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유교 <효경>에서 뽑은 효행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서적인 <仮名本朝孝子伝>(가명본조효자전)에 나오는 71개 이야기 중에서 24개를 선별한 <本朝二四孝>(본조24효)에 삽화를 그린 것이다. 이것이 책에 삽화로 넣은 최초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글씨와 그림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림이 한 페이지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독립된 영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삽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독립된 그림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후 1700년에는 당시 가부키 배우가 공연하는 모습을 그린 <風流四方屛風>(풍류사방병풍)과 기생을 그린 <娼妓画牒>(창기화첩)으로 유명해졌다. 글씨가 있는 책의 삽화가 아니라, 아예 유명한 배우들로만 구성한 그림책이라고 해도 된다. 

토리이 키요노부 (鳥居淸信 , 1664~1729) , 1700년, 풍류사방병풍

 

우키요에는 목판화이다.

이 시기 목판화는 검은색으로만 제작한 스미즈리(墨摺 すみずり)와 여기에 한두 가지 색을 덧칠 한 단에(丹繪 たんえ)가 주류였다. 이 중에서 배우를 그린 작품은 과장법을 사용하여 명쾌한 구도와 강약을 강조한 선으로 그린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극장에 높은 곳에 걸리는 간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려다볼 때 박진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가부키의  과장된 분장과 행동 혹은 이런 연출법과 각본을 아라고또(荒事 あらごと)라고 하는데, 키요노부는 위 그림에서 보듯이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런 것을 표현하기 위래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했는데 효우단아시(瓢箪足 ひょうたんあし)와 미미스가끼(蚯蚓描 구인묘, みみずがき)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요우단아시와 미미스가끼로 그린 표현

이런 방법은 가부키 배우의 긴장된 근육을 나타내기 위해 과장하여 마치 표주박 형태처럼 모습으로 그리는 기법(효우단 앙시 瓢箪足)과 인물을 그릴 때 혹의 무늬를 그리는 기법으로, 구인이란 지렁이를 뜻하는 것으로 지렁이가 꿈틀꿈틀하는 듯한 옷 무늬를 묘사하는 기법(미미스가 끼 蚯蚓描)을 말한다. 선을 꺾지 않고 먹선이 두툼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키요노부의 미인도는 간판 그림 수법을 가미하여 두껍고 힘찬 선으로 박진감 있는 느낌을 표현한다. 대형 화면(大大判, 책 한 페이지 전부를 그린 것으로 '오오반'이라고 부름)에 가득 차게 먹색 한 가지로만 그린 미인의 자태는 흑과 백의 화면을 커다랗게 배분한 것에 의해 대비 효과를 잘 살려내고 있다. 활달한 먹선은 굵기와 부드러운 곡선은 마치 붓으로 그린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아래 왼쪽 그림  <서있는 미인도>(美人図)은 몸집이 풍만하고 둥근 얼굴과 굵은 코를 가진 밝은 얼굴을 한 미인을 그리고 있다.

 

우악한 곡선으로 구성된 장식적인 의상이 특징이다. 그리고 오른쪽 그림은 색을 덧칠한 한 방법으로 그린 <우산을 쓴 미인도>(傘差し美人図)이다.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淸信), (좌)서있는 여인(立ち美人図), 55.3×30.6cm, 17~18세기,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우)우산 쓴 여인(傘差し美人図), 52.3×27.1cm, 18세기,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토리이 키요마스(鳥居淸倍, 미상)

키요노부의 작품형식은 토리이 키요마스(鳥居淸倍, 미상)카이게쯔도우(懷月堂)파 등에 계승된다. 그는 배우 그림(役者繪)과 미인도 분야에서 키요노부에 버금가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토리이 키요마스(鳥居淸倍)는 작품의 양이나 질에 있어서 키요노부만큼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생몰연대도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리이 키요노부의 동생 혹은 아들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도리이 키요마스(鳥居淸倍), 市川団十郎の竹抜き五郎 (市川団十郞(대대로 내려오는 가부키 집 혹은 사람의 이름)의 대나무 뽑는 五郞), 단에, 54.6×32cm, 1711~1716년경, 국립동경박물관 소장

 

또 우키요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토리이 가문의 작가가 있다. 그는 토리이 키요마스의 둘째로 알려진 토리이 키요마쯔(鳥居淸滿, 1735~1785)이다. 13살부터 우키요에를 그리기 시작해서, 간판 그림이나 번부 그림을 그리는 한편 쿠사조우시(草双紙くさぞうし, 삽화가 들어간 오락용 책이다.)의 삽화나 배우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이전보다 표현은 더욱 섬세해지고 우아한 화풍으로 발전했다고 평가된다.

토리이 키요미쯔(鳥居淸滿), 軽業師だるま男(곡예사 달마 남자), 단에, 13.4×26.8cm, 18세기

 

에도시대에 토리이 가문에 이어 등장한 화가는 오쿠무라 마사노부(奧村政信 1686~1764), 니시무라 시게나가(西村重長(1697?~1756), 이시카와 토요노부石(川豊信, 1711-1785) 등이 있다. 이들 화가의 활약한 시기는 우키요에는 紅繪(ベにえ: 丹繪 대신에 紅을 이용하고, 그 외 4~5색을 정교하게 색을 분해해서 칠하는 방법, 漆繪(紅繪 중에서 머리, 띠 등의 검은 부분에 아교를 칠하여 칠처럼 광택을 내고 금박을 붙여 광채를 더한 것)라는 丹繪보다 훨씬 진보된 색채를 사용하는 수법으로, 특히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던 인쇄도 진전되고, 표현에 있어서도 고급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섬세하고 서정성을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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