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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읽는 우키요에(浮世繪) : 탄생 배경과 초기 작가들 (1)

by !))*!))* 2024. 12. 10.

 

에도 시대에 등장한 '우키요에'는 일본 목판화로 유럽 인상파와 현대미술에 영향을 끼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작품들이 많지만 꽤 잘못된 정보가 많다. '우키요에' 탄생에 관계된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알아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가능한 바른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1825년 무렵, 후카쿠 36경에 하나, 가장 널리 알려진 우키요에 작품.

 

 

1. 에도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 1598년 죽자, 임진왜란에 여러 핑계를 대며 참전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다. 결적인 계기는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이다.

 

도쿠가와는 1600년 9월(음력)에 일본의 전국에 패권을 잡고, 1603년 ‘세이다이이쇼군’(征弟大將軍)의 칭호를 받고 진영을 에도로 옮겨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열었던 시기부터 1867년 15대 쇼군으로 막을 내리고 메이지 시대(明治時代)가 시작되기 전까지를 에도시대(江戶時代)라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 시대구분과 문화적 시대구분은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일본 미노국 세키가하라(지금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 결과로 에도시대가 열렸기에 일본의 운명이 바꾼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중요한 일의 고비를 “여기가 나의 세키가하라다”라는 표현 하는데,
이 전투가 일본인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8년 병사하자, 그동안 문치파와 무단파의 분열과
정실파와 측실파의 갈등이 촉발되어 결국 도요토미 가신들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갈리게 된다.
동군의 수장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서군의 수장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였다.

10월 21일 결전의 날 동군과 서군의 20만 대군이 맞부딪쳤다. 높은 곳에 진을 쳤던
서군이 군사 면에서는 유리했으나 서로의 목적이 다르거나 억지로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반면 동군은 미쓰나리를 제거한다는 명확한 하나의 목적으로 똘똘 뭉쳤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근거지였던
에도에 1603년, 막부(幕府, 바쿠후)를 세우고 에도에 거대한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묘사한 병풍. 18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오른쪽에 붉은 깃발이 동군, 왼쪽 파란 깃발은 서군이다. 지형상으로 서군이 높은 곳에 있으며 동군은 평지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투는 전투 개시 3시간 만에 동군으로 승리로 끝난다.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한 도쿠가와는  여러 번 전쟁으로 재정이 어려운 것과 다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봉건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을 감시하고 재정을 고갈시키기 위한 제도들을 만들어 냈다. 그중에서 다이묘들 가족을 에도에 머물게 하고 주기적으로 다이묘를 에도로 오게 만들었다. 그에 따른 경비는 다이묘 자신들이 부담하면서 그들의 재정을 고갈시켜나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를 설립하고 화폐제도를 만들어 상업으로 인한 경제성장을 촉진시켰다. 이에 상인계급이 성장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지배계급인 무인(사무라이) 계급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막부는 유교인 주자학을 에도시대에 통치이념으로 삼아 '삼강오륜'을 강조했다. 오륜 중에서 군신유의(君臣有義)의 본래의 뜻보다는 무사들의 주종(主從) 관계를 철저하게 지켜나가는 것으로 변질하게 된 것이 다르다.

 

무사계급은 사회적으로 지위를 인정받으며 성장하면서, 복장, 언어, 생활 전반에 걸친 지위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에도막부 체제의 무사들은 실전 경험이 없는 계급으로 관료나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상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곤궁함에 시달렸다.

다이묘(大名 : 에도막부 시대 1만석 이상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다. 영지에 대하여 독립된 권한을 가졌으나, 막부에 막대한 군역을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각종 규제, 예를 들면 허가 없이 다이묘끼리 혼인을 금지하는 조항 등을 지켜야 했다.)와 무사들은 상인들을 최저 계급에 묶어두면서도, 경제적인 빈곤을 벗어나고자 부유한 상인들과 혼사를 맺기도 했다.

 

에도막부가 점점 안정되자 상업은 번창하였다. 유통시설이 개선되면서 에도, 교토(京都), 오사카(大板) 같은 주요 도시 외에도 전국에 걸쳐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들 도시의 경제권을 장악한 죠오닌(町人: 商人, 工人)들은 지배계급인 무사, 다이묘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자주 생겨났다. 결국은 아무리 부를 축적하여도 신분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죠오닌들은 소비와 유흥 그리고 축재(蓄財)의 길을 걷게 된다.

 

2. 에도시대의 문화현상

에도는 막부 체제를 위한 정치도시였기 때문에 조기에는 문화적 전통과 기반이 취약했지만, 부를 축적한 죠오닌이 출현하면서 그들이 에도의 문화 주체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정치와 문화 중심지인 교토를 벗어난 이들은 에도의 문학, 연극, 미술을 즐기고 생산하는 주체로 자리한다. 죠오닌들 도시 안에서도 그들만의 구역에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죠오닌들은 정치나 추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개인적이고 즉각적인 향락을 추구하는 문화를 즐겼다. 이러한 문화를 방랑 세계를 그리는 단어인 ‘우키요’(浮世)라고 했다. '우끼요에'(浮世絵)는 유행과 서민적인 오락문화의 대명사로 죠오닌의 주된 풍속을 그린 것이고, 결국 여색(女色)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었다. 원래 우키요는 모든 세상의 덧없음을 말하는 불교의 단어였으나, 점차 종교적 의미는 사라지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받는 환희의 삶을 뜻하게 되었다.

 

죠오닌의 문화는 우키요 즉 오락세계의 산물로써 연예인, 통속소설, 연극, 판화, 유녀(遊女, 몸 파는 여인)를 주된 관심사로 삼았다. 당시 에도의 ‘요시하라’(吉原), 교토의 ‘시마바라’(島原), 오사카의 ‘신마찌’(新町) 등 전국 도시와 특수한 지역에 유곽, 음식점, 찻집, 목욕탕, 극장 등의 환락가가 형성되었다.

 

특히 유곽의 번창은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현상으로, 죠오닌들은 이곳에서 사회계급에서 벗어나 금력을 바탕으로 환락의 세계를 즐겼다. 이곳의 ‘게이샤’(藝者)는 직업적인 접대부나 계보를 가진 유녀나 무용수들로 상인들과 몰락한 무사, 귀족에게 휴식처를 제공하였다. 처음에는 무사들에게 금지구역이었으나 점차 칼을 버려둔 채 홍등가의 오락을 즐기게 된다.

17세기의 유명한 소설가인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1693)는 외설 소설로 화류계 여성을 표현하였고, 이 소설은 인쇄술에 힘입어 당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이 시대에는 인형극도 시작되었는데 ‘가부키’(歌舞伎)라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가부키는 매춘을 수반하여 사회적 문란을 일으키자, 에도막부는 여배우 출연을 1629년에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여우(女優)가 존재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유행에 민감하여 여인의 머리모양, 허리띠 문양 등은 빨리 전파되고 급격히 변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여인에 국한되지 않고 남자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문자의 보급과 인쇄술의 발전은 출판업을 발달시켰는데, 출판업자는 소설가와 삽화가를 고용하여 애정 소설과 유흥가 안내도를 출판하였다. 내용은 멋쟁이 죠오닌이나 게이샤에 관한 내용으로 외설적인 경우가 많아 자주 금지당했다. 당시는 목판이 가장 능률적인 기법으로 ‘우키요에’(浮世畵)라 불리는 풍속화가 주로 제작되었다.

 

3. 초기의 우키요에 

우키요에가 1800년대까지  2세기 동안이나 문화의 흐름으로 지속해 온 것은, 목판화라는 미개척 분야에서 새로운 기법과 여러 가지 표현에 대한 가능성을 지속해서 추구했기 때문이다. 우키요에의 양식 전개는 목판화를 중심으로 그 발달과정을 고찰하는 것이 적당하다.

 

우키요에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모태가 된 것은 목판삽화(木板挿画)라고 할 수 있다. 칸 에이기(寬永期, 1624년~1644년을 지칭하는 연호)에 목판삽화의 표현수법은 초보적 단계에 있었으나,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신흥 도시계급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형식의 책들이 간행되면서 ‘칸 에이(寬永) 풍속화’가 등장한다.

 

결정적인 사건은 1657년에 에도에서 대화재가 일어났고, 이를 기회로 상위문화를 모방하는 대신 독자적인 새로운 문화형태가 도시 사이에 퍼지게 되었고, 그 역할은 목판으로 출판된 책이 담당했다. 목판본으로 만든 책은 나라(奈良時代, 710~ 794)시대부터 있었지만 에도시대에 급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의 유통이 늘어나는 것은 도시에 서점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죠오닌에게도 펴져, 고전을 비롯한 金平本(金平浄瑠璃이라는 인형극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인 ‘金平의 책’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말로 책 내용은 김평의 무용담을 쓴 것으로 연극 대본이라고 할 수 있음), 吉原遊女의 評判記(에도의 유곽인 요시하라에 있는 기녀들의 외모나 기예에 대한 품평서), 好色本(남녀의 직접적인 성 풍속 장면을 소재로 한 것으로 우리는 흔히 춘화(春畫)라고 한다)과 같은 외설 도서에 삽화가 들어간 책이 주로 간행되었다.

 

책이 학문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오락을 위한 독서로 죠오닌 계급을 중심으로 서민들에게 퍼지게 된 것이다. 우키요에의 창시자로 불리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의 출현이 바로 이 시기이다.

 

히시카와 모로노부 (菱川師宣, 1618?~1694), 뒤돌아보는 여인, 17세기 ,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3-1. 우키요에 창시자,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

출생 연도는 이견이 있다. 1630~31년 설이 그것인데 그의 아버지 생년이 1597년으로 확실하고 에도시대 평균 초혼연령이 20세 전후인 것을 감안하면 4번째로 태어난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탄생연도 1630~31년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염직 기술자로 옷소매 등에 자수나 금은박을 붙이는 장인이었고, 자수 도안의 밑그림도 그리기 때문에 미술적 소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태어난 곳은 현재의 치바현이다. 젊은 시절의 기록이 별로 없지만 히시카와는 전통적인 유명 화파들의 그림을 모작하면서 스스로 그림을 깨우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려면 도안하는 손기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히시카와가 언제부터 삽화가로 전업했는지 알 수 없으나, 1670년경에 에도의 삽화 화가로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1672년에 그린 「武家百人一首」(무인 백인을 모아놓은 책으로 같은 이름으로 된 책이 여러 개가 있다)에는 에도의 삽화 화가로서 최초로 서명(자신의 본명인 히시가와 키치베(菱川吉兵衛)을 썼다. 같은 시기에 그린 호색본 「伽羅枕」은 모로노부의 삽화본 중 최고 걸작의 표현을 보여준다.

 

히시카와 모로노부, 武家百人一首에 실린 삽화

 

그의 삽화본은 「武家百人一首」 이후 죽은 다음 해에 출판된 「和國百女」(1695)에 이르기까지 서명이 들어간 작품은 30종 그리고 그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것과 모로노부의 작풍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을 합해 110여 종에 이른다. 그의 전성기인 1683년에는 그가 서명한 책만 8종류가 출판되었다.

 

히시카와 모로노부, 和國百女에 실린 삽화, 1695

 

그의 삽화본은 오토기조시(御伽草子 : 옛날이야기 혹은 동화풍 소설), 好色本, 金平本에서 명소 안내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있다. 그중에는 「このごの草」, 「和國諸職繪つくし」처럼 서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소박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이 유녀의 평판기, 호색본, 침실 그림 등에 그의 전형적인 미인도의 새로운 타입은 히시가와류를 유행시켰다. 초기작의 「伽羅枕」 등에서 보여주는 미인 표현과 「和國百女」에서 보여주는 미인과 비교해 보면, 칸 에이 풍속화에 있어서 전형적인 미녀도 형식으로 고착된다. 이 같은 방향은 이후 우키요에의 미인도 성격을 결정짓게 된다.

 

모로노부는 삽화는 스미즈리(墨摺, すみずり: 검정으로만 찍는 단색 판화)가 가지고 있는 목판화의 제약인 단순함을 살려서 오히려 생생한 움직임을 화면에 만들어 내고 있다. 목판삽화가 가진 표현의 폭을 비약적으로 넓히고, 그 결과 삽화본에 있어서 판화가 가진 역할이 글에 종속되는 것에서 주역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책에서 삽화에서 크기를 늘리고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키요에가 회화로 독립성을 획득하게 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 한 장짜리 회화로 발전하게 된다. 모로노부의 목판화는 거의 스미스리로 손으로 색을 덧붙여 칠하는 정도였지만, 그가 죽은 후 한 장짜리 그림 유행하면서 에(丹繪, たんえ)로 여러 가지 색을 간단히 칠하는 방법이 유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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