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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노는 것도 수준이 있다 - 왜 그림을 사는 거지 5

by !))*!))* 2024. 7. 8.

봄가을에 꽃구경, 단풍구경 가는 게 노는 것의 전부인 시대가 있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는 시대였지만, 놀 것이 없던 시대이니 비난할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이런 관습이 있지만, 여전히 먹고 마시고 다니는 범주를 벗어나는 노는 문화는 별로 없다. 이제 이런 노는 문화도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좋은 놀이도 가져야 한다.  

 

 

좋은 놀이 나쁜 놀이


노는 것에도 풍류가 있고 격이 있다. 노는데 무슨 격이 있고 풍류가 있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  큰소리로 떠들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은 노는 것이 아니다. 밤새도록 고스톱이나 카드를 하는 것은 휴식이 아니다. 이렇게 놀고 나면 몸도 마음도 찜찜하다. 나쁜 놀이인 것이다.

 

좋은 놀이는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력이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또 옛날이야기를 하면, 조선의 선비들은 풍류를 알았다고 한다. 풍류는 속되지 않고 우아하고 멋스러운 정취를 말한다. 풍류라는 말은 삼국사기의 ‘진흥왕조’에 ‘화랑’ 제도 설치에 대한 항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겁게 사는 삶을 위해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연과 더불어 기상을 키워나가는 생활이 풍류를 즐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화랑’ 정신이고,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선비정신’과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풍류’로 이어졌다. 지금 풍류라는 의미와 많이 달랐다.


강희안(仁齋 姜希顔, 1417~1464)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수준 높은 풍류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물과 바위와 덩굴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된 선비의 모습이 그렇게 여유롭고 편안할 수 없다. 풍류는 자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는 삼베옷을 입고 머리에는 방건(方巾)을 쓰고 맨발로 앉아 비파를 켜는 선비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선비 주변에 널려진 기물은 선비의 풍류정신을 엿보게 한다.

 

강희안 고사관수도와 김홍도 작품 포의풍류도
강희안(전), 고사관수도, 종이에 먹, 15세기, 23.4×15.7cm(왼쪽), 김홍도, 포의풍류도, 종이에 수묵담채, 18세기, 27.9×37cm(오른쪽)

 

 

 

 

 

 

이런 풍류를 알면서도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이가 바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이다. 세한도(歲寒圖)는 제주도 유배 중인 김정희가 1844년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1865)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해서 그려 보낸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보다 더한 추상화가 없지’라는 생각이 넘친다. 이 그림을 보고 쓴 감상문이 붙어있어 전체 길이는 15m에 이른다. 

 

선비의 너그러운 풍류와 고고한 기상을 모르고는 이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 옛날 선비들은 놀아도 수준 있게 놀았다. 이게 예전에 좀 안다는 이들의 노는 수준이다.

 

김정희 세한도 부분

 

 

‘Shall we dance?'(쉘 위 댄스) 


수준 있게 놀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잘 놀 수 있는 것이다. 시조 한 수를 읊는데도 법이 있다. 춤추는 발걸음에도 순서가 있고, 손동작도 절도가 있어야 한다. 거문고를 타는 것도 당연히 배워야 하지만, 듣는 것도 배워야 한다.

 

1996년 수오 마사유끼(周防 正行) 감독의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dance?)는 중년남자가 사교춤을 배우면서 춤의 진정한 즐거움을 알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 주인공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사회생활 속에서 우연히, 댄스교습소 창문으로 비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이끌려 춤을 배우게 된다. 처음 어색했던 몸동작과 스텝이 점차 능숙해지면서 리듬에 몸을 실을 줄 알게 된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춤 선생 ‘마이’에게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배운다. 이 영화를 굳이 말하는 것은 춤은 ‘배운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저냥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배우는 과정에서 진정한 춤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노는 법을 잘못 배웠다. 어쩌면 잘못 배운 것이 아니라, 놀이 문화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는지 모른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집안 어른에게 시조 읊는 법이나, 붓글씨를 배웠다. 마을 아저씨나 형에게 구박받으며 장구나 꽹과리 치는 법도 배웠다.

 

시절이 변해 지금은 학교가 이런 교육을 맡았지만 ‘성적 최우선주의’에 밀려, 노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많이들 하는 말로는 ‘인성교육’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은 뒷전이고, 대학입시를 위한 예비학교로 전락하지 오래다. 그마저도 사교육에 밀려 제 구실을 못한다고 난리지만 말이다.


요즘 청소년들은 정작 친구와 친구를 연결시켜 주는 놀이문화를 배우고 즐길 여유가 없다. 같이 노는 문화를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이기적이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타인과는 어울릴 줄 모른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강요받지만,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성장한다. 그래서 관광 철이 되면 으레 사고가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만 즐기면 되니까, 남 눈치 보지 않다가 생기는 사고인 것이다.


이제는 놀이 문화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 놀이문화도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왕이면 우아하고 수준 있게 노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막 추는 춤도, 그냥 흥에 겨워 흥얼거리는 노래도 좋지만, 때로는 스텝과 리듬을 아는 춤을 추거나 보고 싶다. 한마디로 품위와 격이 있는 놀이 문화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음악회도 가고, 연극도 보러 가고, 미술관에도 가서, 수준 있는 문화를 보고 듣고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음악을 구별할 줄 아는 귀를 만들어야 하고,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서 좋은 그림을 보고 미적인 안목을 키워야 한다. 이런 수준 있는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몸에 자연스럽게 배도록 해야 한다.

 

 

그림을 사는 건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투자가 바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무늬만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주말이 되면 화랑을 찾아오는 중학생들이 꽤 많다. 처음에는 이들을 보면서 요즘 미술교육이 많이 나아졌네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호기심에 물었다. ‘왜 화랑에 왔니?’라고. 이들 대답은 숙제하러 왔단다. ‘숙제?, 무슨 숙제?’라고 되물었는데, ‘미술 숙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중학생은 대부분 쭈빗쭈빗 들어와 쓱 그림 한번 쳐다보다가 이내 팸플릿 하나 사들고 나가기 바쁘다. 그걸로 끝이다. 아니면 저희들끼리 무어라 떠들다가 주의를 주면 슬그머니 내빼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들은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화랑이나 미술관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숙제 때문에 온다. 그것도 사전에 어떤 지식을 가지고 오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림과 친숙해지면 다행이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현장교육이라는 허울에 무작정 학생들을 인사동으로 내모는 미술교육은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선생님들 때문이다. 무조건, 무작정 ‘화랑’이나 ‘미술관’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과연 무엇을 볼까. 이렇게 온 아이들 눈에 그림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눈에 보인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닌데, 관심도 없이 보는 그림은 그저 어떤 흔적으로만 보이지 않을지 걱정된다.


창경원에 꽃구경 가던 시절이 있었다. 밤까지 시간을 연장해서 엄청난 인파를 불러 모았다. 지금이야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찾았고, 거기에 있던 벗 나무는 ‘어린이 대공원’에 ‘국립현대미술관’ 가는 산길에 옮겨져 다 없어진 일이지만 말이다.

 

이 시절에 미술은 여느 예술장르보다도 일반인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던 시기다. 그 증거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열리면 기다랗게 줄을 섰다. 심지어 제21회 국전(1972)은 밀려드는 관람객으로 인해 전시 중인 박영선(朴泳善, 1910~1994)의 작품이 찢어지기도 했다.

 

매년 올해 국전에서는 누가 상을 받는지 각 신문마다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작가들은 국전에서 특선이라도 받으면 자신의 예술 인생이 활짝 피는 것으로 알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과열로 말썽 많은 국전이라는 오명을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미술은 관심 밖이다. 물론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 미술교육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 그리고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종사하는 전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이 제공한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미술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못했고, 배울 기회도 제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잘못한 것으로 그림은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아주 깊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시각예술인 미술, 즉 그림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것도 알아야 보이는 것이고, 마음이 있어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서 즐기기 위해서는 ‘그림 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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