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 미술관 전시정보

5월 꽃의 계절에는 고흐의 '아이리스'와 오가타 코린의 '제비꽃' 병풍 감상이 제격

by !))*!))* 2024. 4. 23.

일본 고급 패션의 거리인 오모테산도 근처,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은 매년 봄 일본 국보인 '제비꽃 병풍'(燕子花図屛風 )을 전시한다. 금박을 병풍 전체에 붙여 제비꽃을 그린 오가타 코린의 이 작품은 일본 최고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제비꽃(붓꽃, Iris(아이리스)을 그린 반 고흐 작품도 여러 점이 있다. 두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가 있을까?   

 

네즈미술관은 '특별전 국보·연자화도(かきつばたず)병풍'이 전시된다.

올해는 4월 13일부터 5월 12일까지 일본 미술 및 디자인(The Irises Screens, National Treasure : Japanese Art and Design)이라는 제목으로 제비꽃 병풍과 함께 다양한 작품이 전시된다. 

 

어쩌면 사진으로 보았을지도 모를 이 병풍은 6폭으로 된 2개가 한 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을 그린 오가타 코린(尾形 光琳, 1658~1716)부터 알아보자. 

오가타 코린, 제비꽃 병풍(좌)
연자화도(燕子花 図) 6폭 병풍, 종이에 금박과 채색, 150.9×338.8cm, 에도시대(1710년대)(좌)
오가타 코린, 제비꽃 병풍(우)
연자화도(燕子花 図) 6폭 병풍, 종이에 금박과 채색, 150.9×338.8cm, 에도시대(1710년대)(우)

일본 문화청이 운영하는 문화유산 온라인(Cultural Heritage Online)에서 소개한 글을 잠깐 언급하면,  "6폭 병풍이 1쌍으로 된 이 작품은 병풍 전체에 금박을 붙이고, 농담의 군청과 초록으로 선명하게 그린 제비꽃 무리. 이 제작배경은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에서 제비꽃 명소로 유명한 미카와 하츠바시(三河八橋, 아이치의 동부(愛知東部) 를 미카와의 나라로 불렸다.)를 떠올리게 한다.

 

*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는 와카(和歌)를 중심으로 한 125개 단의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헤이안 시대 노래집이다. 성인이 된 남자의 순수한 사랑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세상과 작별하는 아쉬움을 담은 내용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학술논문으로 다음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람.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80245499

 

좌우가 서로 대비되면서도 리드미칼하게 배치된 제비꽃은 일부에서 형태가 반복되기도 하지만, 뛰어난 장식성이 돋보인다. 또, 안료의 특성을 살려 그려낸 통통한 꽃잎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일본 에도시대만이 아니라, 일본 회화사 전체를 통틀어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자인 오가타 코린( 尾形 光琳, 1658~1716)은 대대로 기모노용 직물을 취급하는 포목점을 운영했다. 에도로 옮기기 이전인 교토에서 귀부인들을 상대로 번창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예술에 조예가 깊어, 할아버지는 교토 교외에 있는 예술촌에서 말년을 보냈고, 아버지는 가무극 노(能)를 사랑했고, 서예도 능했다.     

 

코린은 부유하게 자라면서, 막대한 유산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없이 화려하게 생활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그는 많은 재산을 쾌락과 유흥으로 탕진하면서 40살이 되어서야 결혼한다. 방탕한 생활은 그 많던 재산을 거의 탕진하게 되었고 급기야 생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그림을 배웠는데,  가노파(狩野派)의 일원인  야마모토 소켄(山本素軒)의 지도를 받았다. 소켄은 중국식 수묵화뿐만 아니라, 일본 고유의 주제와 장식 화풍을 따르는 그림에도 능해 두 가지 모두 코린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 가노파(狩野派)는 15세기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 회화 양식의 하나이다. 중국의 수묵화를 제작하면서도 동시에 일본의 전통을 반영한 대형 병풍화도 제작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문인화 전통을 따르기도 했지만, 화려한 일본화풍도 병행하면서 막부의 주문에 따라 매우 높은 보수를 받았다.  

 

오가타 코린이 직업화가로 자리 잡은 것은 1697년 경이라고 알려진다. 1701년 43살에 훗쿄(法橋) 칭호를 받는데 능숙한 작가가 되었음을 증명한다. 이후부터 그는 홋쿄 코린 (法橋 光琳)이라는 서명을 사용한다. 코린의 대표작으로 꼽는 붓꽃 병풍은 네즈미술관 소장품 이외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도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    

오가타 코린, 팔교도 병풍
오가타 코린, 팔교도 6폭병풍(八橋図屏風), 종이에 금박과 채색, 163.7×352.4cm, 에도시대(1709년 이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오가타 코린의 붓꽃병풍은 일본의 장식과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 5천원권 엔화 지폐에 이 그림이 실렸다. 미적 감각이 좋은 일본인들이 인정한 작가의 그림이니 그들의 감성에 딱 어울리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오가타 코린의 제비꽃 병풍에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점을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일본의 여러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장식성은 충분히 인정할만하다. 여기 덧붙여 이처럼 화려하고 대담한 구성을 한 시각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미적 감각이 부럽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금빛이 찬란한 넓은 화면에 제비꽃이라니. 이것은 서양식 색상 체계에서는 보색이다.

 

그러니이 얼마나 대담한 색체계를 다루고 있는 것인가. 300년이 넘은 이 그림이 지금도 여전히 초-현대적인 감각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사회적 미적 감각이라고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예술은 최고를 겪어봐야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코린은 엄청난 재산을 탕진했다고 언급했다. 그 일화 중에 하나는 연회에 음식을 금으로 장식한 대나무 잎에 싸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연회가 끝나고 코린은 이 대나무 잎을 강물에 던졌는데, 이 일로 교토에서 추방당했다. 왜냐하면 평민은 금과 은의 사용이 금지된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런 화려함의 극치를 경험한 오가타 코린은 이런 화려한 병풍 그림을 제작 의뢰받아 완벽하게 완성해 낸 것이다. 그것도 후세에 남는 명화로 말이다. 그만큼 시가예술은 경험이 중요하다. 우리의 미술은 과연 이런 경험을 할 정도로 자본의 지원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직 붓꽃이 필 시기보다는 이르지만 기회가 된다면 우에노 공원에서 열리는 데 키리코 전시와 네즈미술관의 일본 미술 및 디자인 전을 함께 방문하면 뜻깊은 여행이 될 것이다. 

불안과 공허라는 우리의 현재 풍경을 닮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

 

불안과 공허라는 우리의 현재 풍경을 닮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

국립현대미술관은 무엇을 하나, 그 많은 인력과 예산을 어디다 쓰는지라는 글을 쓰며 자료 조사를 하다, 일본 동경도미술관에서 이태리 작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 전시를

red-pig-11.tistory.com

불안과 공허라는 우리의 현재 풍경을 닮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2

 

불안과 공허라는 우리의 현재 풍경을 닮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2

동경도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데 키리코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데 키리코의 예술세계를 알아보려 한다. 데 키리코 전시에서는 자화상과 초상, 형이상학 회화, 1920년대 전개, 회화전통

red-pig-11.tistory.com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 시리즈

1887년 11월 폴 고갱과 처음 만났고, 그해 말에 베르나르, 로트렉 둥과 전시회를 열었다. 이듬해 초에는 쇠라와 폴 시냑과 전시를 열었지만, 2월에는 반 고흐의 작품제작 기간 중에 가장 최고조에 달한 시기인 남부 아를로 이사한다. 동생 테오와 관계도 좋지 않고 파리에 싫증난 고흐는 남쪽 아를로 옮긴 것이다.    

 

이곳의 풍광에 빠진 고흐는 동료 작가들에게 내려올 것을 종용하였다. 마침 폴 고갱이 합류하여 1888년 가을에 합류하여 두 달 조금 넘게 함께 작업한다. 하지만 잘 알려졌다시피 고흐의 간질 증상과 망상, 조울증 등 다양한 정신적 불안정을 견디지 못해 고갱은 그해 크리스마스 이전에 타히티로 떠났다. 

 

1888년 12월 23일,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 건넸다. 매춘부의 신고로 고흐는 병원에 이송되었다. 이 날 고흐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고갱은 이 멋진 도시 아를에 다소 실망한 것 같아. 우리가 작업을 하는 이 자그마한 노란 집과 특히 내게 실망하고 있는 듯싶어. 실제로 이곳엔 우리 두 사람이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단다.

하지만 이 난관들은 다른 어디에 있다기보다 우리 자신 안에 있지.(1888. 12. 23)

 

1889년 1월 다시 작업을 시작했지만, 아를의 주민들은 '미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결국 5월에 아를 근처인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몇 주 뒤, 그의 정신 건강이 안정되자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병원의 정원에 피었던 붓꽃을 그린 그림이 바로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쌌던 바로 그것이다. 아이리스.

인생의 불행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 - 빈센트 반 고흐

 

인생의 불행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 - 빈센트 반 고흐

70년대 유행하던 맥클라인(D. McClean)의 빈센트(Vincent : Starry, Starry Night)라는 팝송을 한때 열심히 들은 기억이 있다. 겨우 알파벳 철자나 깨쳤던 실력으로 무슨 뜻인지 알리 없었지만, 괜히 마음을

red-pig-11.tistory.com

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
빈센트 반 고흐, 붓꽃(The Irises), 캔버스에 유채, 74.3×94.3cm, 1889년, 게티미술관 소장

이때 그린 그림은 다른 그림과 달리 스케치가 남아있지 않다. 아마 스스로 중요한 작품을 제작한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작품과 함께 동생 테오에 의해 1889년 9월 살롱 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당연히 낙방하고 만다.

 

반 고흐는 이곳에 있는 1년 동안 거의 130여 점을 그렸을 정도로 다작을 했다. 잠깐 시절을 앞으로 돌려서 1886년부터 1888년 아를로 이사하기 전까지 반 고흐는 일본 판화 우끼요에 장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파리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하면서 일본 판화를 연구하고 관련 작품을 열심히 모으기도 했다. 우끼요에의 밝은 색채와 병치, 과감한 화면 구성과 선의 역할까지 배우게 된다. 

 

이런 관심은 그가 그린 작품에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비속의 다리, 모작 히로시게>(1887, 73×64cm)를 그리기도 했다. 히로시게의 작품에 관해서는 아래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히로시게의 비속의 다리와 빈 센트의 이 작품은 다음에 함께 다시 언급하려 한다. 

눈오는 밤에 갑자기 떠오른 히로시게의 우끼요에(浮世繪)

 

눈오는 밤에 갑자기 떠오른 히로시게의 우끼요에(浮世繪)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다색 목판화 우끼요에(浮世繪) 3대 작가 중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가 있다. 일본의 명소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당시 일어났던 여행 붐과 맞물려 큰 인기를

red-pig-11.tistory.com

 

1889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기 두어 달 전에 그린 붓꽃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관한 그가 남긴을 글을 보자 

빈센트 반 고흐&amp;#44; 붓꽃빈센트 반 고흐&amp;#44; 붓꽃
붓꽃, 캔버스에 유채, 92×73.6cm, 1890, 반 고흐 미술관 소장(좌)  / 붓꽃,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1890,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우)

 

밝은 녹색 바탕에 장미가 있는 그림과 큼직한 보라색 붓꽃 다발이 있는 그림 두 점을 작업하고 있단다. 후자의 경우, 한 점은 녹색과 분홍, 보라의 배합이 부드럽고도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지.(위 그림에서 오른쪽 작품) 반면 다른 하나는 보라색 꽃들이 눈에 띄는 레몬빛 노란색 바탕-화병과 화병이 놓여 있는 표면 역시 노란 색조들이야-위에 확연히 드러나면서 어울리지 않는 보색들이 서로를 돋보이게 해 환상적인 효과를 자아낸단다.(빈센트 반 고흐, H. 안나 수 엮음, 이창실 옮김, 2007, 생각의 나무)   

 

반 고흐는 노란색과 보라색을 강조하고 있지만 보라색은 세월이 흘러 거의 사라지고 짙은 청색으로 남아있다. 위 글에서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색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색의 조합이 작품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비록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선과 색의 조합과 화면 구성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작품을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권총으로 가슴을 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동생 태오가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을 지켰다. 가슴에 총을 쏜 이틀 후, 1889년 7월 29일.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