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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시인 김춘수 때문에 오해하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by !))*!))* 2023. 11. 7.

샤갈의 그림 중에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은 없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여기저기 카페 간판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카페 이름으로 많이들 좋아했던 문구였던 것이다.  덕분에 샤갈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친숙해졌고, 샤갈이 그린 작품 중에 이런 이름을 가진 작품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참에 샤갈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유태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유태인으로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화가이다. 그는 한 세기에서 두 해가 빠지는 햇수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이 말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서 세속적인 행복을 오랫동안 누리고 간 몇 안 되는 예술가 중에 하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인간의 잔혹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양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자신이 태어난 러시아를 떠나야 했으며 유태인이기에 미국으로 망명까지 해야 했었다. 어느 인생이 우여곡절 없이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할까? 

 

그 어떤 미천해 보이는 생을 붙잡고 이야길 들어도, 애가 타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인생은 없으리라. 그래도 샤갈은 기쁨과 성공이라는 인생의 달콤한 열매를 맛보고 갔기에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다. 더욱이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수많은 예술작품을 남겼으니 말이다. 

 

샤갈의 작품은 우리에게 꽤나 친숙하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샤갈의 전람회가 종종 개최된다. 공공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리기도 했다. 이들 전시는 많은 관람객을 불러들여 성공적이었다. 웬만히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관심만큼 그의 작품에 내재한 것들을, 샤갈이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의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술가로 살기로 결정하다.

가난한 유대인 아버지를 두었던 샤갈은 1931년 '나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자서전에서 자신이 화가가 된 경위를 밝혀 놓았다. 우상화를 금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자란 샤갈은 중학교 2학년 시절 친구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자신은 그렇게 그리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다. 그후로 그는 책에 들어있는 삽화를 베끼고, 자신이 생각한 것들도 그려 침실 벽에 붙여놓곤 했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그 누구도 예술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느 날 친구가 집에 놀러 와  어린 샤갈이 그린 것들을 보고 "야, 넌 진짜 예술가로구나!"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샤갈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예술가가 되기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스승의 격려와 그의 노력에 감탄한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1910년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의 나이 23살에 처음으로 예술의 본고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열정과 전위가 가득찬 파리를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샤갈이 파리에 발을 들여놓은 1910년은 칸딘스키가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해이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형태 파괴를 일삼는입체파 그림, 마티스가 대상을 철저하게 단순화시킨 표현주의 그림, 루소의 소박한 몽환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쏟아지는 해였다. 그 이듬해, 샤갈은 140여 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라 뤼슈(벌집)에 아틀리에를 마련한다. 가난한 러시아 유학생이었던 그는 여러 조각으로 나눈 잠옷에 그림을 그리며, 생선을 두 토막을 내어 하루는 머리 쪽, 이튿날은 꼬리 쪽을 먹으며 그림을 그렸다. 가난과 싸우며 열정의 불로 밤새도록 작업에 몰두하였다. 

 

 

몽마르트에서 입체파를 탄생시킨 아비뇽의 처녀들까지,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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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하다고 거부했던 철 구조물이 예술작품으로 전환된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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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라 뤼슈에 거주하며 혁신적인 생각과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야수파의 색 운용방식, 입체파나 오르피즘을 떠오르게 하는 공간처리 방법을 떠올리게 하는 샤갈의 그림에서 얼마나 파리의 영향이 컸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11년 <나와 마을>, 1914년 <바이올린 연주자>, <일곱 개의 손가락을 가진 자화상> 등이 그 좋은 본보기이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꿈과 추억에 잠겨있는 러시아 고향마을과 농민들의 생활 모습, 종교적인 의식들은 자신의 예술에 있어서 절대적 주제였다.

 

 

 

유대인이기에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1914년 첫 번째 개인전을 베를린에서 열고, 3개월 뒤에 러시아로 돌아간 샤갈은 거기서 그만 1차 세계대전을 만났고,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를 러시아 최고 화가로 대접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은 1922년 러시아에서 영원히 떠나게 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1922년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당시 유럽에서 영향력있는 화상인 '볼라르'(피카소하고도 오랫동안 거래를 했던 유명한 화상)와 거래하면서 자리를 잡는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로 미국으로 망명하고 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프랑스로 돌아와 그곳에서 영원히 잠들 때까지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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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고향인 비테프스크 마을을 그린 작품으로 제작연도는 미상이다.
샤갈, 비테프스크 웨에서, 연도미상

앞에서 샤갈을 친근하게 느끼게 했던 이유가 김춘수의 시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가 여러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시를 적는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몰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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