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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가 잭슨 폴록의 뿌리기 기법

by !))*!))* 2023. 11. 5.

'롱아일랜드에서 자동차 전복사고로 폴록 사망'. 이렇게 1956년 8월 12일 자 미국 신문에 기사로 실렸을지 모른다. 가장 미국다운 작가, 이상한 표현이지만 최초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뉴욕이 현대미술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시기에 한가운데 있었던 작가. 1912년에 태어난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의 마지막은 허망했다. 또 이상한 표현이지만 하나의 예술 신화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죽음

폴록은 정부(情婦)인 에스너를 태우고 만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과속으로 충돌사고를 냈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벽난로에 오줌 누기, 만찬이 차려진 식탁 뒤집기, 바에서 패사움하기, 신경쇠약 등등 온갖 기행을 일삼던 그는 결국 술에 취해 생을 마감했다. 미국 국무부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추켜세우던 그야말로 한창 잘 나가던 작가가 자살이라고 보아도 이해될만한 자동차 사고를 내고 운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이 사고는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당한 비운의 하나일 뿐이다.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는 48년에 스스로 목을 매달았고,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은 62년에 과다한 음주로 사망했고, 가장 미국다운 조각가로 인정받던 데이빗 스미스(David Smith)도 65년 자동차 사고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더 이상 그릴 그림이 없다는 지독한 자만심으로 1970년 스스로 동맥을 그어 자살했다. 하나같이 평온한 삶의 마감을 하지 못했다.   

 

잭슨 폴록의 예술여정

1945년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던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도열렸다. 이 전시에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부터 미니멀 아트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미술평론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미술가이며, 아마 후안 미로(Joan Miro) 이후 최고의 작가일 것"이라는 찬사를 폴록에게 보냈다. 그는 미국의 현대미술을 세계의 현대미술로 이끈 장본인인 그린버그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 두 번째 만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운도 이 시기에 초현실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리던 폴록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심한 음주벽과 갖가지 기행으로 자신을 서서히 망카트리고 있을 때, 그의 동료 화가이자 후에는 아내가 된 크래스너(Lee Krasner)는 폴록과 함께 롱아일랜드로 이사했다. 

 

2001년 개봉된 영화 잭슨 폴락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추운 겨울 아침에 뜨거운 커피 한잔을 들고 작업실로 향하면서 롱아일랜드의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는 폴록, 작업실에 들어와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면서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는 폴록. 너무 추워 곱은 손을 비비며 그림에 열중하는 폴록. 그러다가 우연히 캔버스에 떨어진 몇 방울의 물감을 보는 폴록.

 

 

 

잭슨 폴록 영화 포스터
잭슨 폴록 영화 포스터

 

1947년에 시작된 폴록의 뿌리기 기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영화에서는 묘사한다. 영화적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설도 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가 <흰 눈 위에 뛰노는 하얀 강아지>라는 보이지 않는 그림을 발표하면서 회화의 기법은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고 여겼던 시기에 폴록은 이처럼 붓으로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물감통에 있는 물감을 캔버스 위에 들이붓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폴록은 1951년까지 이 방법으로 눈과 가슴에 격렬한 감동이 치미는 그만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폴록만의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잭슨 폴록의 뿌리기 기법 의미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그림을 공부했고, 그리고 회화의 새로운 기법을 창조해 낸 폴록을 보고 미국 정부는 자국의 문화예술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그의 작업방법은 바닥에 캔버스를 천에 펼쳐놓고 뿌리는 행위에 의한 결과물로 작품을 만든다. 이런 방법은 엄청난 넓이를 가진 미국 국토를 상징할 만큼 무한한 크기로 확장할 수 있었고, 중심과 주변이 없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을 표현한 작업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전면균질회화(all-over-painting)라고 부를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중심과 주변이 없는 즉, 화면 전체가 동일한 힘의 균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를 폴록이 표현했다고 여겼다. 자유로운 행위의 결과가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폴록의 행위는 바로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미국 구무부는 폴록을 비롯한 추상표현주의 작가를 치밀한 계획 아래 전 세계에 홍보했다. 자신들의 의도대로 추상표현주의를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로 홍보한 것이다. 폴록은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나오는공포를 술로 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폴록의 운명을 결정짓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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