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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작가와 전시

몽마르트에서 입체파를 탄생시킨 아비뇽의 처녀들까지, 파블로 피카소

by !))*!))* 2023. 11. 5.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1951년 여름 제느베에브 라포르트라는 여기자와 인터뷰한 뒤 그녀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20여 장이 넘는 드로잉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가 도둑맞을 걱정을 하자, 아예 금고에 넣어서 주는 자상함까지 보여주었다. 이 드로잉이 경매에서 1억 원에 넘게 팔렸다. 그것도 20년에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백구십삼억, 29,300,000,000! - 세상을 잘 살기

무엇이든 돈이라는 숫자로 표현되어야 가치를 알아보는 세상이다. 한참 세어야 하는 이 숫자는 ‘이백구십삼억’이다.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미공개 피카소 그림이 팔린 금액이다. 피카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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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여 부모에게 적극적인 격려와 후원을 받았다.  그래서 1900년 이후 당시 예술의 고향이라는 파리를 방문했고, 파리의 보헤미안 분위기와 미술의 본고장에서 활동하고 싶은 욕심에 1904년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작은 작업실을 얻어 아예 이주했다. 지금의 몽마르트르는 가보고 싶은 관광지라는 느낌이자만 이때만 해도 유럽 각지에서 프랑스에서 젊고 유망한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던 곳이다.

 

몽마르트르에는 월세 15프랑, 공동 수도 달랑하나, 전기와 난방은 아예 없는 '세탁선'이란 별명이 붙은 건물이 있었다. 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거리는 형태가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에 늘어선 낡은 배들과 흡사하다고 이런 이름이 붙여진 곳이다. 이 허름한 곳에 여러 젊은 예술가들이 옹기종기 자신의 예술을 키우는 작업장이자 침실이자 살림방이었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청색시대'라고 불리는 그림들을 그렸다. 1901년 파리에서 그린 첫 그림인 <까마귀와 여인>인 자신의 생활환경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싸구려 술집과 사창가의 창부들, 가난한 화가가 어울려 만든 그림이었다. 밤에는 바닥에 천을 깔고 한 손으로는 등불을 한 손으로는 붓을 쥐고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는 파카소는 서서히 자신을 알아주는 이들이 늘어가자 배경이 핑크색으로 변하는 '분홍시대'(장밋빛 시대)로 접어든다. 이 해에 열렸던 개인은 피카소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시인 '아폴리네르'를 만나고 그의 과대한 찬사를 얻게 되면서 서서히 성공의 길을 걸어가게 되면서 희망을 보았다.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방인이었고 불어도 어눌했기에 프랑스 관전인 '살롱전'에 출품하는 것을 기피했다. 그 대신 그는 미술시장의 생리를 철저히 이해하려 했다. 그리곤 자신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하려 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자 1907년 피카소는 서영미술사에서 길이 남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어쩌면 그 그림은 오늘 우리가 난해해하는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것들의 탄생을 알리는 최초의 그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항구인 아비뇽에 있는 창부를 모델로 한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본 많은 동료 화가들, 특히 평론가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펠렉스 페네옹이라는 당시 유명한 평론가는 피카소가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리곤 "젊은 친구, 재미있는 그림이네. 앞으로 이 방면으로 전념하게. 캐리커처로는 성공하겠
네"라는 평을 했다. 

 

실망한 피카소는 이 그림을 둘둘말아 구석에 처박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은 분명히 공통점이 있음을 간파했다.  이것은 순식간에 전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입체파'(Cubism)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의미했다. 

 

입체파는 아방가르드(전위: avant-garde)로서 이탈리아로, 러시아로, 독일로, 심지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오히려 전위라는 의미는 상실하고 전통주의로 편입되어 갔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입체파 그림을 낯선 것이었다. 

 

피카소 작업을 중개하던 화상 볼라르를 입체파 형식으로 그린 초상화를 단번에 알아본 이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화랑을 다니던 아이였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입채파의 그림은 결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난해한 추상화가 아니다. 피커소 역시 자신은 평생 추상화를 그린 적이 없다고 말했고, 실제로 입체파 이후에는 다시 신고전주의 화풍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피카소는 1930년대부터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갖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다.  그림 한 장으로 유럽의 고성을 사기도 하고 또 섬과 그림을 맞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재산은 보고 싶지 않아도 그가 남긴 엄청난 충격을 준 작품은 언제가 꼭 보리라는 다짐을 하는 이들은 늘어갔다. 참고로 구석에 처박았던 '아비뇽의 처녀들'은 2년간의 어려운 협상을 거쳐, 1939년 재개관을 한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벽에 걸리게 되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
파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피카소도 부자처럼 살고 싶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부자처럼 살고 싶다 - 6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작가라고 할 수 있는 피카소는 “가난한 사람처럼 부자로 살고싶다”라는 뜻밖의 말을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화상인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Daniel-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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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어머어마한 피카소의 그림 값에 비하면, 드로잉 한 장에 1억 원 정도에 팔린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은 피카소이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넘었어도, 그의 그림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어도, 세계인 누구나 피카소라는 이름은 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그만큼 피카소에 대해 모른다. 그 이름만 아는 것이다. 작품제목도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이름만 아는 것이다. 멋모르던 학창 시절, 개발새발로 그린 친구 그림을 보고서 "야! 파카소네"라고 놀려먹던 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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