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처럼 부자로 살고 싶다’라고 말한 피카소의 목표는 자신의 삶과 예술을 자유롭게 해 줄 돈을 버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철학을 한 줄로 정확히 표현한 것이 위대한 예술가답다.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고 아름다운 해줄 만큼만 부자가 되면 된다. 그게 안 되니 문제 이긴 하지만...
피카소가 한 말, '가난한 사람처럼 부자로 살고싶다.'
20여 년 전, 겨울을 뜨뜻하게 한 말 한마디, 광고 “부자 되세요!”였다. 언뜻 그냥 한 말 같은데, 듣는 사람에게 세밑이라는 분위기와 어울려 다가올 해에 조그만 삶의 희망을 느끼게 한 모양이다. 기억에 남는 광고 카피이다.
그 어렵다던 IMF시절에도 들을 수 없었던 이 덕담은 외환위기를 넘기고 점차 경기가 회복되고 있는 시점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느끼는, 신문기사용 용어를 빌리면, 체감경기는 언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징후였다.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때에, 그저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 알았던 평범한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 부자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만 누구나 부자처럼 살고는 싶어 한다.
어쩌면 24년 겨울에도 이런 광고문구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 다들 너무 경기가 어렵다고 힘든 말을 여기저기서 듣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서,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 작가라고 할 수 있는 피카소는 '가난한 사람처럼 부자로 살고 싶다는 뜻밖의 말을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화상인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1884~1979)에게 했다. 기성의 가치와 체재를 부정하는 아방가르드 작가가 부와 명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리라는 선입관 때문에 피카소의 말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피카소, 칸바일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00.6×72.8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은 정신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질이 즉 돈이 뒷받침되어야 영혼이 자유롭다. 아무리 맑은 영혼을 갖고 싶어도 그렇지 못한 예술가 숱하게 많다. 우리가 잘 아는 이중섭도 그중에 한 사람이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미술품은 투자대상이었다.
돈과 거리가 멀 것 같은 미술 아니 미술품은 이미 르네상스 시기부터 좋은 투자대상이었다. 이때부터 그림을 사고파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증거는 넘쳐나게 많다.
르네상스 3대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도 자신의 그림과 능력을 교황이나 유럽의 귀족들에게 제공하면서 예술가는 사업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밀려드는 주문에 응할 수 없어 갖은 핑계를 댔다는 글을 읽으면서 예술을 설명하는 단어로 ‘순수’라는 용어가 그동안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실감 나게 한다.
라파엘로는 심지어 공장처럼 작업실을 운영했다. 많은 제자를 거느리면서 제자들이 그린 그리고 난 마지막에 자신의 붓 터치와 사인으로 작품을 생산해 냈다.
예술가가 사업가라는 생각을 사라지게 만든 사건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키기 위해 물질을 정부가 후원하는 방식으로 옮겨지면서부터 바뀐 것이다.
미술가의 상업적 성공은 예술의 가치를 하락시킨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는 설립 규범을 재정비하면서 ‘작가들이 작품판매에 참여하는 등 사업가와 아카데미 회원의 신분을 혼동하는 어떠한 행동도 금지한다’라는 항목을 넣었다.
이 항목은 사를르 바뙤의 순수예술(Beaux Arts, Fine Arts) 개념이 전 유럽에 퍼져나가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왕립 아카데미의 설립은 순수예술 개념의 전파와 함께 예술의 권위를 끌어올리면서, 작가의 명성과 작품 제작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년 콩쿠르 1위 입상자에게 로마로 유학생을 보내는 제도인 ‘로마대상’(Prix de Rome)은 이런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만들었고, ‘신고전주의’를 확립시켰던 자크 루이스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와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도 이 상의 수혜자였다.
그러나 왕립 아카데미의 막강한 영향력도 충분한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하자 서서히 사라진다. 아카데미 회원은 어떤 사업활동도 아카데미 규범에는 금지되었지만, 드러나지 않게 자신을 홍보하거나 작업실에서 직접 작품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팔기 위해 점점 더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서서히 그림을 팔고 사는 ‘화상’(art dealer)이 생겨났다.
상품으로 미술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하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미술가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성공하는 것만큼이나,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쿠르베는 왕립 아카데미가 실시하는 살롱전에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4년에 입선했다. 그의 작품은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거절당하면서도 계속 출품했지만 아카데미 회원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쿠르베가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물론 살아서도 부는 누렸자), 그의 인기는 미술시장에서 날로 높아져 인상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인상파는 ‘낙선작가들의 살롱’(Salon des Réfusés) 전을 개최하여 아카데미의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를 갖기에 이른다.
19세기말 예술가는 사업가라는 예전의 전통이 되살아나면서 20세기 작가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후원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흔히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말처럼 본격적인 미술시장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화상까지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인상파는 미술문화 구조를 뿌리 채 흔드는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별 혜택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사정이 달랐다. 1900년에 파리를 처음 방문했던 피카소는 당시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작품을 다루는 전문화상이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화랑에서 1901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어눌한 불어와 외국인이라는 약점 때문에 살롱에 출품을 기피했던 피카소는 첫 전시의 실패로 미술시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은 미술시장을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을 빠르게 익혀나갔다. 이런 노력은 볼라르뿐만 아니라 ‘앙드레 르벨’(Andre Level)이라는 미술품 수집가를 만나면서부터 경제적 성공을 만들어 나간다.
결국 ‘가난한 사람처럼 부자로 살고 싶다’라고 말한 피카소의 목표는 자신의 삶과 예술을 자유롭게 해 줄 돈을 버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파리에 온 지 약 30여 년만인 193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현대미술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성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피카소와 달리 평생 동안 암울한 삶을 살다 간 미술가들은 더 많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을 팔고 싶어 했지만 한 점도 팔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와 잠깐이지만 함께 작업실을 사용했던 고갱도 미술문화 중심지인 유럽에서 미술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타히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경제적 문제가 컸다. 박수근 역시 피카소와 같은 세속적인 욕망을 가슴에 묻은 채 이 세상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박수근은 가세가 기울어 보통학교로 배움을 마치고, 그 후 순전히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했다. 1932년부터 43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이나 입선하면서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박수근은 피카소처럼 시대의 운이 받쳐주질 못했다.
1945년 ‘해방’과 곧 이은 ‘한국전쟁’은 그를 더욱더 혹독한 가난의 길로 내몰았다. 1952년 서울로 온 뒤 그는 혜화동의 어느 화방에서 그림을 팔기도 하고,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곧 초상화 그리는 일마저 그만두고 전적으로 자신의 작품제작에만 전념했지만, 간혹 미군이나 그의 가족들에게 그림이 팔리는 것이 전부였다.
1960년 전후부터 미국인 밀러(M. Miller) 여사와의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작품이 팔린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생활은 여전히 힘들었다. 당시 국내에 반도화랑이 있었지만, 미술시장이라고 할 만한 것도 본격적인 화상도 있기 이전이기에 박수근은 시대의 운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박수근이 자신의 시대를 열심히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면서 선전과 국전에 끊임없이 출품을 했다. 하지만 동료들에게조차 그의 예술세계는 인정받지 못했고, 그대로 자신의 어려움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박수근은 자신의 삶과 예술을 위해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피카소처럼 성공하지 못했다. 이중섭 역시, 권진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삶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크기는 다를지라도 이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부자처럼 살고 싶어 한다.
‘돈은 좋은 머슴이기는 하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는 영국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말이다. 돈은 자신이 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유로운 사고와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돈은 곧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에 대하여 무관심했을 것 같은 예술가들도 경제적 성취를 첫 번째 목표로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부자로 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삶 전부를 들여 아름답고 창조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부자처럼 살다 간 예술가들 때문에 우리의 삶이 윤택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우리도 부자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즐거울 때도, 울적할 때도, 가끔 여행을 할 때도 지나치지 않고 미술관․박물관에 가는 이유는 자신의 삶과 마음을 부자처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예술품을 보면서 그들의 삶과 그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낀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활력과 독창적인 상상력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인 만큼 우리는 수많은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에게 문화혜택을 받는 것이다. 또 그만큼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지난날 ‘메디치’, ‘간송 전형필’ 그리고 예술문화를 사랑하고 후원한 사람들 때문이다.
이제는 정말 ‘문화의 세기’이다. 말로만 하는 문화의 세기가 아니라 긴 안목으로 내다보는 예술문화를 가꾸어 가야 한다. 13세기에 바다를 메워 만든 황금의 땅, 베니스처럼 멀리 보아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광화문 한복판에 100미터짜리 태극기 게양대를 올린다고 한다. 그게 문화마케팅인 줄 안다.
노는 것도 수준이 있다 - 왜 그림을 사는 거지 5
봄가을에 꽃구경, 단풍구경 가는 게 노는 것의 전부인 시대가 있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는 시대였지만, 놀 것이 없던 시대이니 비난할 일이 아니다. 지금도 이런 관습이 있지만, 여전히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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