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사려면 한마디로 공부해야 한다. 남의 말만 믿거나 자신의 눈만 믿고 사면 결과는 뻔하다. 그림은 무조건 잘 보관하면 값이 상승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미술작품 투자라고 하는 것은 천에 하나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모르고 덤비면 쓰레기로 돈 주고 버려야 한다.
그림은 원래 어려운 것이다.
“어렵다!”
그림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나,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입에 자주 올리는 말이다. 현대미술이라는 것을 보고는 ‘어렵다’ 거나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림을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저런 것을 왜 그렸을까, 왜 저런 것이 미술이라고 할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일이 많다.
그림을 보고는 마치 한 눈에 척 다 알아버렸다는 듯이 떠들어대는 모습이 어떨 때는 꼴불견으로 보이는 것은 이런 심정 때문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며칠을 아니 알 수 없는 시간을 화폭에 매달리고, 무엇을 그릴 것인지 수많은 낮과 밤을 고민하고 고민해서 탄생한 것을 어떻게 한눈에 그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그림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지 모른다.
* 마르셀 뒤샹의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8에 개최된 적이 있다.
현대미술은 그린다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시회에 출품하고자 했던 뒤샹의 샘이 거부된 이후의 현대미술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 대상을 모방하고, 감정을 표현하거나 혹은 숭고한 문학적 주제를 재구성하는 고상한 관념에 반대한 미술은 추상이라는 난해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작품이란 본질적으로 작가의 독특한 시-지각(視-知覺)의 결과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만들어진 창조물이라는 뒤샹의 주장은 20세기 초 젊은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이들의 관심은 인간정신 탐구에 두게 되었고,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콘라드 피들러(Konrad Fiedler, 1841~1895)는 그동안 불분명했던 ‘철학으로서 아름다움을 규명하는 일’과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작품’을 구분하고자 했다. 그의 생각에 동조한 힐데브란트(Adolf von Hildebrand, 1847~1921)는 조형예술에 있어서 형식의 문제(1893)에서 예술창작의 형식주의 즉 "자연에 실재하는 존재형식을 추상활동에 의해 표현하고자 하는 작용형식으로 나타난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그림은 더 이상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구성하는 원형을 추구하는 추상화라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얼마 후, 리글(Alois Riegl, 1858~1905)은 후기로마 시대의 공예(1901)에서 후기로마에 나타난 공예형식은 앞 시대로부터 ‘내적 필연성’을 가진 발전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자 했다. 내적 필연성의 바탕에는 예술의욕(Kunstwollen)이라는 힘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보링거(Wilhelm Worringer, 1881~1965)는 추상과 감정이입(1908)에서 리글이 말하는 예술의욕의 작용을 명확히 규명하고자 했다. 예술의욕에 의해 인간과 환경의 행복한 친화가 이루어지면 ‘감정이입’ 충동으로, 환경에 의해 내적 불안이 야기되면 ‘추상’ 충동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미술의 역사는 이 두 방향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론은 미술사에서 창작론에서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으로 나누는 설과 유사한 것으로 감정에 가까운 것이냐, 이성에 가까운 것이냐를 놓고 대립하는 설로 프랑스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대립을 떠올리면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보링거는 이 감정과 이성의 대립이 아니라, 헤겔의 유물론처럼 정반합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여러 화가에게 작품제작의 지적인 바탕이 되었다.
위와 같은 학자들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은 독일의 ‘다리파’를 비롯해서, 추상의 창시자들로 언급되는 ‘칸딘스키’(Wassilly Kandinsky, 1866~1944)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이라고 구분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지적인 바탕이 되었다. 이런 지적인 바탕이 축적될 무렵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바로 1917년에 뒤샹의 샘이 등장한 계기가 되었다.
자연이나 현실세계를 모방하는 것에서 관심이 떠난 작가들은 인간 정신세계를 탐구하고 그것을 시각화하기 위한 새로운 형식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처음 등장하는 이런 경향을 '초현실주의'라고 부른다. 이들은 정신의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인 면보다는 정신의 불연속성과 무작위성, 우연성에 더 매력을 느끼고 빠져든다.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이브 탕기(Yves Tanguy, 1900~1955),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그림에서는 더 이상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숭고한 고전적인 주제는 찾아볼 수 없다.
1차 대전이 끝난 20여 년 만에 다시 일어난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미술의 중심지를 뉴욕으로 옮겨버린다. 이렇게 유럽은 ‘예술의 고향’으로 되었고, 미국의 뉴욕은 현대미술의 새로운 보급자리가 되었다. 자리를 옮긴 현대미술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첫 스타가 얼마 전 영화(영화는 폴락으로 썼다)로 개봉되기도 했던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이다.
그리고 미국의 현대미술이 세계미술로 전파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평론가가 바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이다. 추상표현주의, 색면추상, 미니멀리즘이라는 복잡한 이름을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통일시킬 만큼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린버그 사후에 그의 이론은 맹 비판을 받게 되는 운명을 겪었을지라도 그에게 빚지지 않은 현대미술가는 없다. 이런 걸출한 스타를 배출한 미국은 곧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고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예술을 만들게 되었는데 바로 ‘팝 아트’이다.
당시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에 막 진입하던 시기의 미국은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언급하는 팝 아트에 열렬히 환호하면서 미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힘을 키워나갔다. 팝아트의 대표작가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이런 미국사회의 속성을 간파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누리는 작가가 되었다.
대략 현대미술은 이런 과정을 거쳐왔다. 산업이 발전하면 할수록, 첨단기술이 등장할수록 현대미술 작들은 이런 현상을 철저히 이용했다. 이제 미술은 더 이상 넘지 못할 영역은 없다. 자신의 영역만이 아니라 이웃의 문화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다. 심지어 정치나 경제분야의 문제도 언급하는 것이 바로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은 카멜레온을 닮았다. 예전에는 그림이라고 생각지도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마저 버젓이 화랑에 미술관에 들어와 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림이고 현대미술인지 혹은 예술이 아닌지 판단하기조차 어렵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예술의 정의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해졌다. 어떻게 어렵지 않을까.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림도 공부해야 아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건방진 생각도 든다. 그림도 예술도 사람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렵다고 너무 쉽게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모르겠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해하려는 최소의 노력을 들이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해서 하나씩 알아 가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나를 이해하고 우리를 이해하고 사회를 알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신이 나고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 이해하고, 즐기려는 것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자신의 지적․문화적 수준을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노는 수준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어렵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보면 얼마나 걷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시기를 거치면 걷는 것은 너무나 쉽다. 걸음마를 배우지 못해서 못 걷는 일은 없다. 다만 제대로 걸으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한 걸음걸이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림을 보기 위해 일부러 화랑을 찾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기는 늘었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화랑 문턱이 여전히 높게 느껴지는 것 같다. 높은 화랑 문턱을 넘어선 대부분 사람들도 그림 보는 태도는 불량하다. 그저 휙 한 바퀴 돌고 나가면 끝이다. 보는 눈이 낯설어 익숙하지 않더라도 들어온 화랑에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한다.
좋은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화랑은 많은 노력을 들인다. 아니, 작가는 자신의 개성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속에서 고민과 고통을 겪는지 한 번쯤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돌아갈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림을 보기 위해 화랑 문턱을 넘었다면 말이다. 우리들의 관람객은 가끔은 아주 무성의하다. 너무 성급하다. 소설을 읽어도 끝까지 읽어야 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음악도 연주가 끝나야 훌륭한 음악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어떻게 도입부만 듣고 그 음악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고 즐기기까지 하려면 적어도, 그림이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여유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느긋하게 천천히 하나하나 그림에 눈길을 보내서 말을 걸어오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럴 틈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관람객에게 그림은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림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자세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그림을 쳐다볼 때, 비로소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도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러고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그림을 이해하길 포기하든지 아니면,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
요즘은 거의 사라진 말이지만, 곧잘 집안의 어른이 우스개 소리로 “알아야 면장 (面牆, 面長, 이에 대한 유래는) 한다”라는 말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무슨 일이든지 배우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초등학교서부터 아니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다닌다. 그런데 정작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배운다는 자세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모두 배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배우는 것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언제인가 신문에 OECD 회원국가중 평생교육을 실시하고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의 통계를 냈더니 우리나라가 꼴찌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일등이다. 아니, 그렇게 자녀의 교육에는 열을 내던 사람들은 왜 자신은 정작 배우려 하지 않을까. 아이들만 학생들만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배움은 평생을 다해도 모자란다.’
그림감상을 제대로 하는 취미를 갖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배워야 한다. 책 읽기는 취미가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다. 수준 높은 취미를 갖기 위해서 책을 읽으면서 그림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서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면서 꾸준히 그림에 대한 지식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이런 투자가 쌓이면 미술문화에 조예가 깊어질 때 누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당당히 ‘그림감상’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렇게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어지면 당연히 그림도 사게 된다. 왜냐하면 그림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림을 사는 것도 배워야 좋은 그림을 살 수 있다. 흔히 경제적으로 넉넉하기만 하면 그림을 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부유한 계층이 넉넉하다고 쉽게 그림을 사면, 십여 년 이상을 화랑들이 미술시장이 불황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림은 눈으로 사는 것이고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림을 사랑하고 그것을 수집할만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 그림을 사는 것이다.